창세기의 종말 사상


제 1장 서론

3) 종말론적 축복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출근하는 길에 한 장로님을 만났다. 그는 어깨가 축 처져서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힘없이 걷고 있었다.

  “장로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깨가 축 처지고, 얼굴이 밝지가 않네요.”

  “목사님, 지난 안식일 설교를 듣고 맥이 다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 설교를 생각하며 나를 살피면서 걷고 있습니다.”

  “설교가 감명이 깊었던 모양이군요?”

  “글쎄요, 감명 깊은 설교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을 낙심하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어떤 설교를 들었습니까?”

  “신명기 28장을 설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여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떡 반죽 그릇까지 복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이런 복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고 뒤꽁무니나 따라가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 처지를 생각했지요. 그래도 안식일을 잘 지키려고 대우 좋은 직장을 떠나서 겨우 연명할 정도의 수입밖에 못 버는 직장을 다니면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그것이 믿음이 없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탓이라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결론은 내 처지가 신명기 28장의 축복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맥이 없습니다.”

  “장로님, 신명기 28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언제나 그 설교처럼 적용시키면 문제가 참 많습니다. 신명기 28장의 축복은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종말론적이라니요?”

  “이제 헤어질 자리가 되었으니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부탁드리는 것은 그 일로 어깨가 축 처지고 근심하는 모습을 하지 마십시오. 그 설교가 장로님에게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된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축복의 진정한 의미와 그 성취의 때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축복들이 거의 모두가 종말론적이다. 그래서 신명기 28장의 축복도 종말론적 축복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신 28:1-14).

  이 축복을 현 세상적인 것으로 보았을 때에 성도들이 실족할 수 있다. 이상의 말씀을 읽으면 현세적인 부분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정적(實定的)으로 적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일 때, 그 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했더라면 이 약속이 그들에게 세상에서도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신명기 28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성취되었다. 이것을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만일 적용한다면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마귀와 싸우는 싸움과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사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이 축복이 문자적으로 적용되고 성취되어야 한다고 할 때에는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사실 옛 이스라엘에게도 이것이 미래적, 종말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실이 시편 73편에 기록되어 있다. 전도서 8장에도 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 73:1-28).

  이 시편은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종말론적 사고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시인은 악인이 잘되고 평안한 것을 보며, 의인이 고난 당하고 가난하고 징책을 당하는 자 같음을 보고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의 상식으로는 의인이 잘되고 악인은 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모양은 정반대이다. 그러니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지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의심을 사실로 여겼다면 그는 영원한 실족을 할 뻔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악인이 서 있는 곳이야말로 미끄러운 곳이었다. 종말에 그것이 확실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후에 영광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이 놀라운 사실을 전파할 것이라고 고백하며 시를 맺는다. 전도자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같은 사상을 말하고 있다.

  “악한 일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1-14).

  이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죄의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예외 규정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를 하시는 일이 분명히 있다. 사자굴에서의 다니엘이 그렇고, 풀무 불 속의 세 청년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지 보편적인 경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과 핍박과 환난을 당하였는가? 이사야는 톱에 켜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예레미야의 고난은 이미 그의 글 속에 나타나 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고 말한다(렘 20:14-18). 히브리서는 고난 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이 땅에서는 고난과 싸움을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 10:32-34).

  “더 낫고 영구한 산업” 그것은 종말론적인 약속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축복을 이렇게 종말론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 세상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9-11).

  온유한 자가 차지할 땅은 현재 상황에서의 땅이 아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땅이다. 곧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 그 땅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때를 기다리며 산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단 12:13).

  끝날에 누릴 업 그것이 온유한 자가 차지할 땅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지라도 끝 날에 있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에 의하여 넉넉히 견딘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라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18-25).

  이처럼 성경의 약속은 소망으로 일관되어 있고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을 겪은 후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은 소망이요, 종말론은 소망론이다. 또한 종말은 사람들에게 죄가 현실적으로 끝나는 때며 영생의 생명이 실현되는 때이다.

  이런 사상은, 이미 위에서 지적했듯이 창세기의 창조 사건에서부터 계시적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이미 죄가 세상을 덮은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종말론적 사상에 입각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아담도 오실 자의 표상이 된 것이다(롬 5:14).

  현재의 이 세상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세상은 썩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것은 썩는 것이 아니요 영원히 있는 것이며 썩는 양식이 아니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증된 부활의 생명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참 생명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현실화한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이렇게 권고하셨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그것을 구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주실 것이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내가 이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 40, 44, 54).

  예수님의 이 말씀이 드러낸 사상은 태초부터 있는 사상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도록 계획하셨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떠나면 그는 곧 존재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예정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계획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러나 그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바 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잃어버린 인류를 찾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을 종말에 살리시고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사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보이시는 분으로 계시되어 있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우리가 창세기에서 종말론적 사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사 46:10).


    1) 세상 것은 지나간다.

    2) 진동치 못할 나라

    3) 종말론적 요소

    4) 역사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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