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종말 사상


제 9장 아브라함의 행적에 나타난 종말 사상

4) 그의 생활 정신에 있어서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사적은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사는 종말인의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믿음으로 살았고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을 증거하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여기 실상이라고 번역된 말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이다. 이 말은 등기문서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등기문서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이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영원한 본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등기문서였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는 사람들은 그가 소망을 위하여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소망의 증거물이었다. 소망은 종말에 성취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소망의 등기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존재가 곧 종말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그 종말은 소망의 성취라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물이어야 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 25).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신앙의 선조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종말적 사상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종말론적인 백성이며, 이 죄의 세상에서 종말론적 약속이 없다면, 또 그 성취가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두 번째 조상 노아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사적에서 새로운 시작의 형상을 볼 수 있다. 그 모양들이 비슷하다.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벗었다. 성경에서 벗는다는 것은 사망을 표상하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2-4).

  이 말씀에서 벗는 것은 죽음을 덧입는 것은 부활을 뜻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스가랴에 나타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과정에도 이 사상이 나타나 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3).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는 여호수아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대표한다. 그런데 그 옷을 벗겼다. 스스로 벗은 것이 아니라 벗겼다. 이것은 대신 죽으실 주님의 희생을 표상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힌다. 이것은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킨다.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은 그가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는 것으로 정녕 죽을 것을 확인시키셨다. 그들이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엮어 두른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얻어보려는 노력의 모습이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으니 그들 스스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오면 그들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죽은 자가 어떻게 스스로 생명을 회복하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입히실 때에 그들이 만든 무화과 잎사귀로 만든 옷을 벗기셨다. 그들이 그 옷을 벗은 것은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 대신 짐승이 죽었다. 그래서 가죽을 남겼고 그들에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구속이다. 여자의 후손은 죽음 다음에 있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약속이다. 성경의 종말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소망의 기별인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은 옛것의 종결을 가리는 것이 아닌가!

  둘째, 노아는 홍수 후에 술을 먹고 벌거벗었다. 벗었다는 것은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은 사상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벗었는데, 노아는 포도주를 먹고 벗었다. 성경에는 포도주가 뱀같이 물것이라고 말한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잠 23:31).

  노아는 홍수에서 죽음을 면하고 아담의 혈통을 잇는 새로운 시조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포도주로 인하여 뱀에게 물렸다. 에덴 동산에서 여자를 물고 아담을 물었던 뱀 사단은 노아를 물었다. 그래서 그는 벌거벗고 누웠다. 지나치게 상징적으로 설명한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노아가 사단에게 공격당하여 쓰러진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단은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한다. 그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이런 경험으로 노아는 함에게 조롱을 당했다. 가인을 넘어뜨린 사단은 함을 사로잡았다. 노아의 실수를 통하여 함이 어떠한 성질을 가졌는지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실수를 드러내고 비난하는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정신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허물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분임을 셈과 야벳의 행동을 통하여 드러내셨다. 노아의 아들들을 통하여 나타난 이 현저한 대조를 성경에 기록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과 사단의 무자비함을 읽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함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허물에 민감하고 정죄하기를 잘 한다. 그러나 우리가 셈과 야벳의 성질을 배워야 할 것이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한다(벧전 4:8).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허물을 맡으시고 그 가죽옷으로 우리를 덮으신 것이다. 그의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노아는 포도주에서 깨어난 후에 그 아들들이 행한 일들을 알았다. 그는 깊은 명상에 잠겨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류의 모든 족속의 조상이 될 그 아들들의 미래를, 예언의 신이신 성령의 감동을 미리 보여주셨다. 그리고 셈의 장막에서 새로운 시작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6).

  노아가 저주를 했기 때문에 함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 것을 예언의 신 곧 성령의 감동으로 미리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예언한 것이다. 함과 그의 후손들이 이 경고를 듣고 회개했다면 종의 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의 이름을 불러서 저주의 말을 했다. 훗날 그들은 이스라엘에 의하여 쫓겨날 수밖에 없는 가나안 족속들이 된 것이다(창 10:15-18). 그들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이 레위기 1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함의 아들 구스는 구스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구스 족속은 흑인이다(렘 13:23).

  한 조상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인종이 나왔는가에 대하여 아무도 만족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유전 인자에 대한 비밀이 풀려가고 있으니 언젠가 대답이 나올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나라에 가서 대답을 듣게 될 것인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태도와 생활 환경이 그렇게 변질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돼지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멧돼지를 집에 데려다 기르니, 어금니가 들어가고 삐죽 나온 주둥이가 뭉툭해지는데는 여러 대가 걸렸으나, 집돼지를 산에 두고 살핀 결과 삼대 째에 어금니가 나오고 입이 삐죽해지더라는 것이다. 환경이 달라질 때에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렇지 않을 때에는 잠자던 유전 인자가 활성화되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유전 인자가 비활성화되면 그 비활성화된 기능은 나타나지 않지만, 환경이나 여건이 주어질 때에 필요한 인자가 활성화되면 그런 기능이 발달하게 된다는 것은 오늘날 유전 인자에 연구 결과로 무리 없이 이해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많은 인종이 있게 된 것은 죄로 지구 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을 때에 그 환경과 인간의 죄성의 영향으로 유전 인자가 그렇게 변질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는 지리적 환경과 기후 조건과 문화적 환경 등, 여러 여건에 합당하게 유전자가 활성화되고 또는 비활성화되어 여러 인종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인종은 오직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혈통으로 지어진 존재들이다. 이제 영원한 나라가 이루어지면 같은 환경 조건하에서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처음 창조할 때의 아담과 같은 고상하고, 영광과 존귀를 입은 아름다운 형상으로 모두 회복될 것이다.

  노아가 함의 후손의 미래에 대하여서만 계시를 본 것이 아니다. 셈과 야벳의 후손의 미래에 대하여서도 계시를 보았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6).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한다는 말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말이다. 노아는 하나님을 셈의 하나님으로 불렀다. 그것을 훗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셈을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택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메시야가 셈의 계통으로 오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의 계통으로 오셨다.

  그리고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야벳 족속이 셈 족속의 종교적 신앙적 특권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셈의 하나님의 종교는 야벳에게서 창대하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를 거쳐서 예언의 계통대로 세상에 오시고 유다에서 시작하여 헬라와 로마를 거쳐서 창대하게 되었다. 헬라와 로마는 다 야벳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이런 약속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말씀이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아담이라는 말은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의 약속으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신 것처럼 노아에게도 새로운 시작을 말씀하셨다.

  아담과 노아는 다 인류의 새 조상들이다. 그들이 다 허물을 범하고 구원의 약속을 받으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곧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하는 영원의 후사를 남기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셋째,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물론 아담이나 노아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담이 죄를 끌어들이는 시작이 되었고, 노아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어도 그들이 다 믿음의 조상들이다. 그러나 성경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인류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고, 그랄에 갔다가 동일한 내용의 허물을 범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과의 언약에 철저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고난 당할 빌미를 만들었다.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것을 의로 정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한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를 구하였다. 하나님은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다. 짐승을 쪼개어 마주놓고 언약의 두 당사자가 그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방법이다. 이것은 만일 둘 중 하나가 언약을 어기면 그렇게 쪼개어도 좋다는 참으로 끔직한 언약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짐승들을 쪼개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새를 쪼개지 아니한 이유에 대한 해석들이 많다. 레위기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는, 새는 작기 때문에 쪼개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레 5:8). 그러나 여기는 아직 레위기의 지시가 주어지기 전이며, 레위기의 경우는 언약의 짐승이 아니다. 거짓 맹세와 부정을 속하는 제사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짐승을 쪼개는 것은 언약 문제이다. 언약을 결코 어기지 않는다는 증표로 짐승을 쪼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새가 작다고 쪼개지 않았다면 그것은 언약의 어떤 부분은 그대로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약속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약으로써의 완전한 효력이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기다리는 동안 솔개가 사체 위에 내리는 것을 쫓았다. 사단이 그 언약에 틈탄 것이다. 사체가 있으니 솔개가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체결하는 중대한 언약이다. 사단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일이다. 과연 사단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캄캄함이 임하였고 아브라함은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 새는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쪼갠 사이로 지나갈 수가 없었다. 언약에 하자(瑕疵)가 생긴 것이다. 그 즉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400년 간 이방의 객이 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허물이 그의 후손들로 애굽에 종노릇하게 한 것이다.

  아담과 노아처럼 아브라함도 사단이 틈타는 허물을 저질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짐승을 쪼개는 언약을 체결하기 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신 것을 변경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위로 믿음으로 얻은 의를 온전케 하였다. 그때 그는 구주의 십자가를 보았고, 이삭을 부활로 받는 일로 부활의 새 생명이 구주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이런 의미에서 모두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가 된다는 말은 그 이전 일을 종결짓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종말에 예수 안에서 영원한 한 새로운 민족이 형성될 것에 대한 종말론적 모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부르심에 있어서

    2) 약속의 땅에 대하여

    3)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결과에 대하여

    4) 그의 생활 정신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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