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종말 사상


부록


  이 글은 1998년 북부 캘리포니아 Mountain View시에 있는  마운틴뷰 중앙 교회(Mountain View Central Church)에서 ATS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주최의 온 세계적 성경 대회(World wide Bible Conference)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제목은 인격 종말론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함께 싣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여기에 싣는다.


Third Annual

BIBLE CONFERENCE

“ESCHATOLOGY”

(Study of Last-Day Events)

(November 20-22, 1997

Mt. View Central SDA Church California)

Myung Ho Kim (Mt. View Korean SDA Church Pastor)

                      


인격 종말론


  주제에 따라 저는 인격종말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마지막 날 사건들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저의 강론은 주제에서 벗어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함께 나누어서 유익할 것이라 믿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종말론에 대한 저의 개인적 이해부터 잠깐 말씀드린 후에 인격 종말론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점을 양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다 잘 아시는 대로 종말론은 세상 역사의 끝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종말론에 대하여 강론하려면 예수의 재림과, 재림 사건에 관련된 역사의 종말에 있을 인류와 사회에 일어날 사건들과, 재림 후에 있을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하여 강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으로는 종말론이 단순히 역사의 종말에 있을 일련의 사건과 그 사건들의 진행과 결과에 대한 것을 연구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계시는 종말론적 사상에 입각하여 기록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조명을 빌려서 말한다면 종말론적이 아닌 것은 다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불확실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이해가 없이는 성경의 기별의 진수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말론적인 사건은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 할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화될 때 오직 그것만이 사실이요 확실한 것입니다.

이제 다음의 제목들로 구분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창조와 종말

2. 축복과 종말

3. 성소 제도와 그 봉사의 교훈

4. 인격 종말론

5. 종말인 예수님

6. 진정한 종말은 죄가 끝나는 것임


  1. 창조와 종말론

  저는 하나님의 창조에서부터 종말론적 사상이 계시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천지의 창조는 종말론적 사건에서 나오는 신천신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론의 성취가 없으면 성경의 예언은 헛된 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이라는 말도 종말론적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종말론은 성경 계시의 진정한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31과 요한일서 2:17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것들은 모두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39:6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림자가 실체(實體)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실체(實體)가 확고히 되는 것이 종말론의 의미가 아닙니까? 

그림자 같은 이 세상의 것은 다 진동할 때가 온다고 히브리서 12:26-29에 말합니다. 진동한다는 것은 만든 것들의 변동할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진동할 것들이 다 진동하는 때가 종말이요 그 이후에 진동치 못할 나라가 서는 것이 종말론의 결론입니다.

  이 진동치 못할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 비로소 건설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입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약속하신 다스릴 땅, 온유한 자에게 기업으로 주실 그 땅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부터 하나님은 종말론적 사상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물론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이런 종말론적 신학이 생겨나지 않았겠으나, 처음부터 종말을 보시는 하나님에게는(사 46:10) 그 영원한 세계가 종말론적이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축복과 종말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축복들은 모두 종말론적입니다.

  신명기 28장의 축복이 종말론적입니다. 이 축복을 현 세상적인 것으로만 보았을 때에 성도들은 실족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시편 73편에 기록되어 있고 전도서 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73:1-28은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종말론적 사고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해 줍니다.

  전도서 8:11-14에는 “악한 일의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은 죄의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예외 규정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를 하시는 일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지 보편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아주 잠시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보상이 정반대로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을 위의 성경 말씀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시편 73편 기자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소망을 주시고 그 성취를 약속합니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9-11)라고 약속하셨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롬 8:18-25) 말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약속은 소망으로 일관되어 있고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을 겪은 후에 현실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소망이요 종말론은 소망론입니다. 또한 종말은 사람들에게 죄가 현실적으로 끝나는 때며 영생의 생명이 실현되는 때입니다.

  이런 사상은 창세기의 창조 사건에서부터 계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이미 죄가 세상을 덮은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종말론적 사상에 입각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이해해도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담도 오실 자의 표상이 된 것입니다(롬 5:14).  

  우리가 구하는 것은 썩는 양식이 아니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증된 부활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참 생명인데 마지막 날에 현실화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내가 이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39, 44, 54).

  이 말씀이 드러내는 예수님의 사상은 태초부터 있는 사상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 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런 사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보이시는 분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이런 약속된 소망을 세상에게 주었습니다만 이것을 차지하도록 준비된 사람들만이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참으로 취할 사람 곧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3. 성소 제도와 그 봉사의 교훈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교훈은 종말에 대한 확실한 소망과 그 소망을 신뢰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성소의 역사적 역할을 생각해도 종말 사상이 그 역사에 깊숙이 새겨졌음을 보게 됩니다.

  성소 봉사를 공부하면 이스라엘이 배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대속죄일의 봉사는, 일년마다 심판을 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배도와 죄가 일년마다 정리되고 반역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나라를 이룬 다음에 성소 봉사는 광야에서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성소는 더럽혀졌고, 성전은 퇴락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이 성소 제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교훈은 분명한데 종말에 하나님이 세상의 죄를 소멸하시고 세상을 정결하게 하신 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죄 없는 생명들을 영원하게 하실 것이 소망의 계시입니다. 이런 종말적 소망을 성소의 역사적 역할에서 읽지 못하면 성소 문제를 잘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소는 한 나라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기 전에 개인을 정결케 하는 일을 합니다. 속죄일에 온 이스라엘이 정결케 되는 예식을 하지만 그날 자기를 살펴야 하는 것은 각 개인들입니다. 그 개인들이 자신이 확실히 사죄를 받고 정결하게 되었는지를 확인 받는 날이 아닙니까? 그 속죄되고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 개인은 그날 회중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속죄 받지 못한 상태로 있으면 온 회중이 정결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입니다. 이 속죄되고 정결하여진 개인, 이 사람이 창세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역사적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상속받을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상속받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렇게 상속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우리를 그처럼 사랑하신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적 종말론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더 인격 종말론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인격 종말론

  나는 역사적 종말론 연구하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장로교인이었다가 1959년에 재림교인이 되었는데, 그때에 각 시대의 대쟁투를 읽으며 장로교회에서 배운 종말론과 현격한 차이를 발견하고 그 정연한 논리성에 탄복 해 마지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2,300 주야의 해석은 나를 압도적으로 매료시켰습니다.

  재림 교인이 된 후에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과 관련하여 재림이 너무 가깝다는 이야기를 깜짝깜짝 놀라도록 자주 들었습니다. 그 중에 천주교회와 미국이 연합하여 역사의 종국을 주도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인 것이라서 관심을 모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천주교인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일요일 휴업령이 곧 내리고 종말적 사건이 잇달아 일어날 줄 알았습니다. 많은 선배 재림 교인들이 그렇게 말했고 예언적 상황이 그렇게 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이렇게 멀쩡하게 있고, 내가 개종할 그 무렵에 듣던 절박한 이야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제 공황 이야기, 천주교가 어떻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 미국이 어떻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 일요일 휴업령이 곧 제정될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 이런 이야기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우리는 시세의 흐름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참으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교회가 2,300주야 해석과 재림 운동의 여파로 형성된 교회이기 때문에 시기에 대하여 참 민감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다니엘 12장의 1,290일 1,335일에 대한 성취가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해석이 대두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관심을 끌며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일들이 전혀 나쁘지만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날 그 역사적 시점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일요일 휴업령이 바울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주 안에서 잠든 모든 성도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종말론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말론은 창조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격 종말론을 강조합니다.

  역사적 종말에 있을 사건들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여 그 역사적 시점이 되었을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 내가 살아 있지 않으면 그 사건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종말은 내가 죽을 때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이 사실을 우리는 자주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재림의 날을 아는 지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은 이치로 재림의 시간을 우리에게 알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죽는 그 시간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후의 나는 아무런 상황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주께서 깨울 때를 의식 없이 기다릴 뿐입니다. 의식 없이 기다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영광 중에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을 나는 종말인이라고 정의합니다. 종말인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 Dr. Davidson에게 의논을 하였더니 “Escathological Person”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을 종말인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삶의 순간 순간을 종말인으로 사는 사람, 곧 개인적으로 종말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을 나는 인격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인격 종말론은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Dr. Davidson은 “Personal Escathology”라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이 “Personal Escathology”에 대하여 남대극 교수는 “Personal”이라는 말이 한국말 “인격”이라는 말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합당한 대안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인격이라고 하면 한 사람의 사람됨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이 종말론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제 죽더라도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종말인 곧 마지막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직시한다면 우리가 죽는 날이 재림을 맞이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주안에서 잠든 모든 성도가 주님이 재림하시는 역사적 시간에 재림을 맞이하겠지만, 각 개인적 상황으로 보면, 바울은 기원전 67년경에 재림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 경에 재림을 맞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세월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면 재림의 시기 문제에 그렇게 민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항상 종말인으로서 이미 재림을 맞이한 사람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격 종말론자가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재림을 맞을 수 있도록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진정한 종말론적 태도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적 사상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2-44).

  이 말씀은 언제든지 주인을 맞을 준비가 된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렇게 깨어 있는 삶 이것이 주안에 있는 종말인의 삶입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이 말씀은 우리가 재림을 맞을 준비를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미 하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준비하신 그 안에 거하면 됩니다.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종말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종말인이시기 때문입니다.


  5. 종말인 예수님 

  성경에 이 종말인 곧 종말론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계시되어 있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나 사람을 가장 중심에 놓고 귀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 사실에 여러분들이 다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그 세상은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사 45:18)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일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두고 있는 사람은 집단이기보다는 개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앙은 어떤 종교적 집단에 가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인데, 곧 하나님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賞)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개인적 관계를 가지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과 개인적 관계를 가지므로 생명으로 존재하게 된 사람, 이런 사람이 종말인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롬 3:23). 사람이 아담의 후손인 채로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는 살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출 33: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현재의 모습 곧 아담의 후손인 상태로 사람이 노출되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고후 5:18). 하나님의 영광 앞에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종말인입니다. 예수께서 혁혁한 영광으로 불꽃에 옹위되어 강림하실 때(살후 1:7) 이 영광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개인들이 그를 영광 중에 맞이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주님의 재림을 계시하면서 각인의 눈이 저를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계 1:7). 각인은 개개인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주 앞에 설 수 있는 각인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각인들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히 1:1) 이 아들을 개인적으로 바라보고 믿은 사람들이며, 오늘 우리도 이 아들을 개인적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분은 바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말씀하시는 때가 바로 모든 날의 마지막입니다. 물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 2)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해 오신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에 또 아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때가 모든 날의 마지막인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참된 생명으로 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이후 아담의 모든 후손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참된 의미로 산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고전 15:22).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후에 마침내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사망의 세상과 사망의 사람들의 마지막을 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오신 마지막 사람, 곧 유일한 산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망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생명이 오셔서 사망을 끝내었으므로 예수님이 오신 때는 “모든 날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예수님이 마지막 사람으로 오셨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5:45에는 예수님을 마지막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은 마지막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종말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지막 사람이라면 예수님 이후에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합당한 생각입니까?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 앞에 실제로는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죽은 자들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산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이 된 아담의 후손들을 살리심으로 비로소 하나님 앞에 산 사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산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안에서 나가는 것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 있을 사람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예수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인류는 예수님 한 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우리는 있으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이 마지막 사람인 것처럼 마지막 사람인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은 그 존재 자체가 사망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고 요한일서 5:11, 12에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날 마지막에 오셔서 그분 안에 들어오는 자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생명이 되셨다는 말은 사망을 폐하셨다는 말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복음으로써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함을 드러내셨습니다(딤후1:9, 10). 사망을 폐하셨다는 말은 죄를 끝내셨다는 말입니다.


6. 진정한 종말은 죄가 끝나는 것임

  나는 죄가 끝나는 때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죄가 있는 한 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 봉사를 하시는 것은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죄를 영원히 끝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가 끝날 때 그때가 진정한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개개인에게 죄가 끝나면 그들은 종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죄는 예수 안에서 끝납니다. 예수 없이는 죄가 끝날 수 없습니다. 다니엘  9:24에 죄를 끝내는 일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가 끝날 때가 실제적인 끝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끝난 사람은 종말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죄를 끝내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누구든지 죄가 끝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예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그분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당당히 그의 재림을 맞이합니다.

  이제 말을 마치면서 종말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개개인의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를 바랍니다. 그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종말인이신 것처럼 예수 안에서 종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의 실제적인 종말의 때는 그가 죽는 때인 것을 기억합시다. 언제 잠들든지 그 후에는 그들에게 세월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날 바로 잠드는 그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며, 그때의 그들의 인격 그대로 예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죄가 끝난 사람, 곧 종말인으로 잠들었으면 예수님의 영광 앞에 영원한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로 예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아버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여 더디지도 빠르지도 않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 사건을 살피는 일은 종말의 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개인이 종말인이 되는 인격 종말론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영생의 소망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이 바로 종말인이 되는 데 있다는 확실한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깊이 인식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종말론이 소망론이며 영생의 생명의 실현론이며 종말은 소망이요 존재가 주안에서 영원히 확립되는 때라는 것을 기억하고, 종말인으로 살면서 주의 오심을 생활로 증거하는 인격 종말론자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을 마칩니다.


                                  1997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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