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수요일


비잔틴 건축과 모자이크의 진수 성 비탈레 성당

오전에 데오도릭 황제가 황실의 채플로 지은 누오보 성당을 들러서 아리안족의 성당과 침례탕을 방문했다. 오전에 아리안 주의자들의 성당과 침례탕에 갔다. 침례탕에 그려진 그림은 예수께서 나신으로 침례요한에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고, 옆에서 성부께서 지켜보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라벤나는 비잔틴의 건축과 모자이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산 비탈레 성당은 비잔틴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오래된 벽화들은 먼지가 쌓이면 복원하는 일이 간단하지 않지만 산 비탈레 성당을 비롯하여 라벤나에 있는 벽화들은 정교한 모자이크로 되어 있어서 시간이 지나 먼지가 쌓이면 물로 씼어내기만 하면 원래의 색을 다시 찾게 되어 천년이 지나도 색이 선명하다. 산비탈레 성당 안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대리석들도 얇게 쪼개어 대칭을 이루게 붙여놓아 그 자체만으로도 미술적인 가치가 탁월했다.

신곡(神曲)으로 유명한 단테의 무덤도 라벤나에 있다.


카놋사의 굴욕과 교황의 지상권

점심 식사 후에 라벤나를 출발하여 카노사로 향했다. 카노사는 교황권이 어떻게 세속적인 권력 획득을 완성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등극하자마자 군주가 갖고 있는 성직 임명권을 다시 교회로 가져오려고 했고, 26세의 패기 넘치는 군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50세의 그레고리 7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의 파문으로 응수했다. 교회의 권위가 오늘날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던 중세 시대에 파문은 곧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제후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다른 황제를 선출하려 했다. 하는 수 없이 황제는 교황에게 사죄하기로 결정하고 교황을 찾아 나섰다. 교황은 독일의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독일로 향하다가 독일황제가 남쪽으로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위협을 느껴 투스카니의 여공작 마틸다의 소유인 카놋사 성으로 피신했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알프스를 넘어가 1977년 1월 25일에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놋사에 도착했다. 황제의 옷을 벗고 수도사의 복장으로 황후와 함께 사흘 동안 용서를 빌었다. 1월 28일, 성문 앞에서 사흘 동안을 금식하며 맨발로 교황 알현을 청했다.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너무나 가파른 곳에 왕복이 불가능한 차선을 갈지자로 운행하며 올라갔다. 버스에서 내려 카놋사 성까지 500여 걸음을 가파르게 올라갔다. 큰 도로에서 버스가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얼마나 굽이굽이 돌고 도는지 내려오는 길에는 일부러 세어보았다. 70번을 완만하게 그리고 가파르게 회전하며 내려왔다. 이렇게 험하고 높은 곳을 1월의 추위 속에 사흘 동안이나 맨발로 올라와 빌었다는 것은 직접 이곳을 와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을 올라올 수 있었을까, 그것도 맨발로... 황제의 다급했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마침내 사흘 동안 눈속에서 맨발로 엎드려 빌던 황제는 사면을 받았다. 카놋사 성을 교황에게 내어준 마틸다는 후일에 여자로서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묻히는 특전을 누리게 되었다.

세속적인 권세가 교황에게 온전히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교권과 세속적인 권리를 장악한 교황권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그 역사의 현장에 서서 다시 한 번 성경 예언의 성취들을 실감했다. 두 시간을 달려 파르마로 와서 여장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