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최후의 원시부족 하자베(Hadzabe)의 땅, 기데루(Gideru)를 다시 찾았습니다. 오늘은 옥수수 심는 날. 말만 거창하지 제 손엔 옥수수 4킬로 짜리 한 봉지와 젬베(Jembe)라 불리는 곡괭이 16자루, 그리고 땅에 뿌릴 촉진제 한 통이 고작입니다. 다행히도 사바나(Savannah)기후에 맞춰 개량된 종자들은 물 없이 씨를 뿌려도 곧 다가올 우기에 비만 적당히 내려주면 잘 자란다고 하네요. 극심한 건기를 지나고 있는 하자베 부족의 요즘 식사는 운두시비(undusibi)와 타파베(tafabe)라 불리는 야생열매, 그리고 몸집이 작은 토끼뿐입니다. 운두시비는 끈적이면서도 떫은 것이 우리나라의 익지 않은 감맛이 나서 그나마 먹을 만 하지만, 타파베는 입이 거부하는 생경한 맛 때문에 설명조차 불가한 열매입니다. 메마른 곳엔 작은 생명체도 깃들기 어려운 법. 그나마 간간이 잡히던 코요테도 종적을 감춰버린 지금, 어른 발바닥만한 토끼로는 영 배가 차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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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가 운두시비, 두번째가 타파베 열매입니다.


땅 대신 산을 헤치며 살아온 사냥꾼들과 함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대지 위에 씨를 뿌리자니 순간 막막함이 밀려왔지만, 일단 가져간 곡괭이의 헤드와 자루를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은 저마다 활을 다듬던 칼을 빼내어 나무자루를 다듬었고, 저 역시 괭이가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못을 두드려 박았습니다. 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하늘을 향해 먼저 기도를 올렸습니다. “뭉구 웨투, 우투파티에 음부아 콰 아질리 야 차쿨라 나 바라카 야 킬리모.”(Mungu wetu, utupatie mvua kwa ajili ya chakula na baraka ya kilimo. 하나님, 이 땅을 축복하사 양식을 위해 필요한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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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이 앞서나가며 땅을 파면 몇은 뒤에서 골 안에 씨를 뿌렸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아이들도 자기들이 먹을 식량인줄 아는 듯 조잘거리며 달려와 씨가 묻힌 골마다 흙을 덮었습니다. 부모님 허리 곁을 맴돌며 씨앗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이 슬쩍 지나갔습니다. 청년들은 젬베를 휘두를 때마다 초아 초아(choa choa)”를 외치며 함께 웃었습니다. 얼핏 듣기에 좋아,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하자베들이 한국말도 할 줄 하네?’싶어 그 뜻을 물어봤더니 농사 짓세, 농사 짓세라는 말이랍니다. 아하! 하는 제게 이제부턴 음충가지 차(Mchungaji Cha, 차 목사)가 아닌 초아 초아 차’(Choa choa Cha)로 부르겠다며 하자베 식 개명까지 해주었습니다. 농사짓는 차씨, 괜찮은 이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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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큰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랜드 크루져 두 대가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야생동물 학술 팀이라는데 1년에 한 두 번씩은 꼭 하자베 지역을 방문 한답니다. 청년들은 익숙한 광경인 듯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차에서 줄지어 내린 12명의 와중구(Wazungu, 외국인)들은 한 시간여를 있다가 다시 쌩하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한 음제(Mzee, 노인)가 제게 말했습니다. “타아시시 닝기 파모자 나 마쿤디 야 와투 와메템벨레아 하파 기데루. 와나쿠자 콰 사바부 자오 마알루무 키샤 쿠온도카 하라카. 와나세마 마네노 투, 나 시오 쿠투파티아 차쿨라. 니메샤쿠바티쟈 일리오피타. 나파함 뭉구아투펜다사나 카티카 시쿠 히 암바요 투나파냐 슈굴리 야 킬리모(Taasisi nyingi pamoja na makundi ya watu wametembelea hapa Gideru. Wanakuja kwa sababu zao maalumu kisha kuondoka haraka. Wanasema maneno tu, na sio kutupatia chakula. Nimesha kubatizwa iliopita. Nafaham Munguatupenada sana katika siku hii ambayo tunafanya shughuli ya kilimo, 1년에도 몇 번씩 저런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다녀간다우. 와서는 쓱 둘러보고 서둘러 가버리지. 자기 배만 채우고 가는 거야. 지금까지 당신들처럼 우리를 생각해 준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어. 배고프다 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 나도 지난번 침례를 받았는데 당신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이렇게 옥수수를 심어주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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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게 속 얘기를 꺼내시는 할아버지 곁에서 고작 옥수수 한 봉지를 들고 서 있는 제 자신이 갑자기 민망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피상적인 관심의 대상자로 마치 구경거리처럼 전락해 버린 하자베 부족.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에도 이리 고마워하는 사람들.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멀어지는 차 꼬리를 시선으로 좇으며 작은 움막에서 얼마나 쓸쓸했을까. 지금이라도 당신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난 그동안 너무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던 게 아닐까. 그런 당신들을 몰랐었다고, 그렇게 사는 줄은 몰랐다고 변명하는 게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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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기데루를 나오는 길, 하자베 청년 한 명을 데리고 인근 하이돔(Haydom)이라는 도시에 들렀습니다. 옥수수 25kg과 젬베 몇 자루를 더 사서 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어제 심은 것까지 합해서 30kg 정도면 기데루 마을 전체가 내년 한 해 먹을 양은 된다고 하네요. 옥수수를 따서 쩌 먹는 것이 아니라 말려서 가루를 빻은 후 보관하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주변 사역자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걱정을 하더군요. “그 정도 양이면 1년은 충분히 먹을 텐데 아마 수확한 즉시 동이 날걸요?” 아니 왜요? “하자베는 조금이라도 수입이 생기면 먼데 사는 친척들까지 다 불러다 나눠 먹는 사람들이에요.” 그렇습니다. 토끼도 가구별로 나누는 이 사람들이 오랜만에 얻은 옥수수를 혼자 먹을 리가 없지요. ... 끝까지 마음을 후비는 사람들, 내년 3, 퍼주고 또 퍼줘도 착한 하자베 사람들 오랫동안 먹고도 남을 만한 많은 옥수수가 수확되면 좋겠습니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태양 아래 초아 초아를 외치며 농사의 기대감을 노래했던 하자베 사람들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네요.

 

끝으로 옥수수 씨앗을 후원해 주신 한국삼육중고등학교 총동문회에 감사를 드립니다.

 

곧 기데루에 교회 건축이 시작됩니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 기초라도 놓을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마른 벌판에 싹을 틔우고 알알이 영글 옥수수처럼 하자베 사람들의 마음 밭에도 행복과 감사의 열매만 맺히길 기도해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