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북탄자니아연합회 안에는 또 다른 가정의 선교사 부부가 살고 있는데요. 바로 필리핀 출신의 아바(Aba) 장로님과 넬리(Nelly) 사모님 부부입니다. 선교사로서 첫 발을 내딛던 해가 1980년 초이니 올해로 아프리카 봉사 39년째를 맞은 셈입니다. 대총회 소속 IDE(Inter Division Employee) 선교사 중 현존하는 최장기 선교사 부부. 대총회 지티 응(G.T. Ng) 총무부장님 께서도 인정한 기록이지요. “아프리카에서 30년 이상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젊은 신부로 엄마로 그리고 선교사로 내 젊은 날을 보냈네요. 이곳은 나의 두 번째 모국입니다.” 여유 있는 미소로 지난 삶을 회고하는 넬리 사모님에 비해 제 자신은 아직도 까마득한 햇병아리만 같습니다.

 

1979, 당시 막 30대에 들어선 아바 장로님은 마닐라에 위치한 미국계 기업에서 꽤나 좋은 보수를 받으며 부장급으로 일하던 엘리트였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던 그였지만 종종 해외선교소식에 등장하는 아프리카를 마음 깊숙이 품고 있던 신앙 깊은 청년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안식일 오후,  대총회 선교사를 모집하는 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토목 공학(Civil Engineering) 전공자 우대. 에디오피아의 아카카키 미션스쿨(Akakaki Mission School)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공고였지요. 당시 동아프리카 전역에는 곳곳에 미션 스쿨이 세워지고, 대학과 교회, 그리고 병원 등 교단 시설물 건축이 한창이었습니다. 이 분야에 해외 선교사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지요. 곧 아프리카로 떠나겠다는 전도유망한 청년에게 회사 대표는 말했습니다. “1년만 경험해보고 돌아오세요. 당신의 직위와 사무실 모두 그대로 남겨두겠습니다.” 어머니는 막내야, 가지 말아라. 거기가 어디라고 가느냐. 곁에 있어다오.”하며 울었습니다. 결국 1년만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고 고국을 떠난 지도 어언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4년 후, 케냐 켄두미션병원(Kendu Mission Hospital)의 관리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장거리 연애를 이어오던 넬리 사모님이 마운틴 뷰 대학을 갓 졸업하고 케냐로 합류했습니다. 1985 12 1, 그들의 첫 아들인 길 마이클(Gil Michael, Mikko 이하 미코)이 태어났지요. 병원의 물이나 전기 시설은 저녁만 되면 끊어져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탄자니아도 그렇지만 음카(mkaa, )나 구니(Guni, 장작)를 태워 어둠 속에서 아기 씻길 물을 데워야만 했지요. 더구나 임신 기간 중엔 말라리아에 걸려 꽤나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입덧으로 밥을 먹지 못할 때, 마닐라에서 즐겨 먹던 프링글스 감자칩이 어찌나 생각나던지켄두의 구멍 가게에서는 도무지 찾기 어려운 외국과자 생각에 눈물 흘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날로 자라가는 미코의 모습은 그 모든 시름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넬리 사모님은 그 후, 셀린(Celine, 여아)과 니젤(Nigel, 남아) 두 아이를 더 출산했지만 유아호흡곤란증후군이라는 같은 병명으로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4년 간격으로, 출산 다음날 일어난 똑 닮은 비극이었지요. 청천벽력 앞에 젊은 선교사 부부의 슬픔과 충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빗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우기가 되면 사모님은 남편을 불러 말했습니다. “여보, 얼른 무덤에 가봐요. 제발, 내 아이들 우산 좀 씌워 주세요.” 젖지 않게, 비에 휩쓸리지 않게 지켜주세요두 아이에 대한 상실감은 첫 아이 미코에 대한 집착과 과잉보호로 이어졌습니다. 미코는 다섯 살이 넘도록 집안에서만 키웠습니다. 마당조차 밟지 못하게 했고, 먹는 것 하나, 행동 하나 하나를 엄격하게 단속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늘 천식을 달고 사는 미코를 지켜보던 한 이웃이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들려주었습니다. “미코에게 바깥 공기를 쐬게 해줘요. 친구들과도 어울려 놀면 한결 좋아질 거에요.” 오랫동안 닫혀 있던 마음과 세상을 향한 창을 열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웃들의 사랑 덕분에 미코는 서서히 천식에서 해방되었고, 아바 선교사님 가정에도 다시금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케냐에서의 오랜 생활을 마친 아바 장로님 부부는 지난 2002, 아루샤에 있는 교단 대학에 부름을 받고 탄자니아로 왔습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014, 탄자니아 연합회를 끝으로 명예로운 은퇴식을 치뤘습니다. 34년간의 대총회 IDE 선교사로서의 기간을 모두 채운 것입니다. 그러나 은퇴 즈음 이어진 이곳 연합회의 간곡한 요청으로 2019, 현재까지 엔지니어 컨설턴트로서 계속해서 봉사 중입니다.

 

이제는 항공권, 노동 허가 비자비, 심지어는 의료비까지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하는 단기 계약직이지만, 장로님 부부는 기쁜 마음으로 생애 마지막 봉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수년 전,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필리핀에 다녀와야 했어요. 대총회 규정상, 심파시 리브(Sympathy leave, 질병이나 죽음으로 인해 고국의 가족을 방문할 때 받는 휴가)는 열흘 밖에 낼 수가 없어, 끝내 아버지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게 제일 마음이 아파요.” 아버지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던 막내 아들이었기에 더욱 힘들었다는 아바 장로님. 일흔이 넘어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막내 아들, 이 분의 뺨에 흘러 내리는 눈물을 보며 저 또한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습니다. “선교사로서의 여정이 즐거운 모험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실망과 슬픔, 답답함의 연속일 때가 많았어요. 그러나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지난 날은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나와 우리 가족을 사용하셨다는 것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아바 장로님 부부의 유일한 아들인 미코는 케냐의 맥스웰 아카데미(Maxwell Academy, 동아프리카 지회 안에 있는 국제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도미하여 패시픽유니온칼리지(Pacific Union College, PUC) 에서 BSN(Bachelor of Science in Nursing, 간호학) 학위를 마쳤습니다.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병원의 심장혈관센터에서 수석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여 돌을 갓 넘긴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장으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바 장로님은 올해로 탄자니아 사역 8년 차에 들어선 저희 부부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들려주셨습니다. “아프리카에 살며 배운 것,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늘 상기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 포기하고 싶은 나날들이 분명 있을 거에요. 그때마다 나는 여기에 왜 와 있으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정직해야 해요. 난 건축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물건을 떼거나 업주와 직접 이야기할 때가 많았어요. 기관에 보고한 내용보다 싸게 일을 맡거나 커미션을 받을 때도 있었지요. 그 때마다 모든 돈은 내 주머니가 아닌 기관으로 가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현지 정부와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의견이 다를 때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 차분하게 설명해야 해요. 전문적인 식견을 말해야 할 때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외국인이라는 것, 선교지는 해당 정부와 교단 지도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요.”

 

아바 장로님 부부는 마지막 노동 비자가 만료되는 내년 4, 필리핀으로 영구 귀국 할 예정입니다. 이제 아프리카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10개월 남짓입니다. 돌아가면 마닐라의 재림대학(Adventist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AUP) 옆에 정착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그곳에 은퇴한 선교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고 합니다. 틈틈이 모은 돈으로 휴가 때마다 고향을 찾아 집 한 채를 지었는데 이제는 완성되어 주인의 귀환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네요. 3층 높이의 감각적인 디자인과 강한 비바람이 부는 필리핀의 기후를 고려하여 콘크리트로 지어진 튼튼한 외관. 그 멋진 집을 잠시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생애 절반 이상을 타국에서 보낸 선교사 가정의 노년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멋진 집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의 선대하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16:31)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71:18)

 

아바 장로님의 노년과 우리 모두의 삶에 위의 말씀이 풍성히 넘치도록 응답되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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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냐에 막 도착한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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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딸이었던 셀린의 무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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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두미션병원에 위치한 세번째 아들 니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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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 미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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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주 안식일을 아바 장로님 부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