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일 안식일

일몰오후 521

 

기억절 :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1~22).

 

연구 범위 : 10:19~25, 4:16, 24:8, 4:7~8, 13:34, 10:24~25.

 

히브리서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인 믿음을 다루는 부분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다루는 부분이 번갈아 등장한다. 다시 말해 히브리서의 신학은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고 이론이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저자는 우리의 희생 제물이시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큰 신학적 주제(7:1~10:18)를 그린 뒤에 신자들에게 이러한 진리에 입각하여 생활하도록 격려하며 권면한다. 우리는 이러한 권면을 특별히 히 10:19~25에서 볼 수 있다.

원어로 보면 이 말씀은 길고 복잡한 하나의 문장이다. 이 문장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첫째, ‘~하자라는 의미의 구절로 시작되는 세 개의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둘째, 각 구절마다 믿음, 소망, 사랑과 유사한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각 권면은 기독교 신앙의 또 다른 측면

을 포함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히 10:19~25을 공부하면서 그리스도인 생활에 필요한 실제적인 권면을 다루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의 믿음의 근원은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서 우리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이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 그분의 권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도록 우리를 격려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행하기 : 하나님처럼 죄인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키운다.

 

A.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권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이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확신은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유지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지 서로에게 권면해 봅시다.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진리를 위할 때에 확신을 유지하고 서로 권고하는 사랑을 발휘할 수 있다.

 

B.

경험상 두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 얼마나 큰 지장을 줍니까?

두 마음을 품으면 한곳도 온전한 헌신을 할 수 없다.

그래도 우리의 실패보다 구원의 소망을 붙드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확신은 우리의 구원의 보장이 된다.

마지막 때일수록 자주 모이라는 권면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말씀을 실제로 따르는 믿음의 정신이다.

 

결론 :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돌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약한 자들을 돌볼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시킵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새 예루살렘까지 동행해야 합니다.

 

 

첫째 날() 하늘 성소에 다가감

1222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1. 4:16, 6:19~20, 10:19~21을 읽어 보라. 신자들은 어디에 가까이 갔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 어떤 희망이 있으며, 이 희망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6:19,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10:19~2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가까이 간다.

 

신자들은 영적으로 하늘 성소 곧 하나님의 보좌에 접근할 수 있다. 예수님의 피와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대변하는 그분의 역할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다(4:14~16, 6:19~20). 예수님은 하늘 대제사장으로 즉위하신 뒤부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권한을 갖게 되셨다(6:20). 즉위식에서 그리스도는 왕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하는 모습으로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3:21).

다행히도 인류의 대표자께서는 아버지의 임재 안에 계신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지상의 제사장은 우리를 위해 온전하게 봉사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더 좋은 제사장이 있다. 어떤 것도 아버지와 아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릴 휘장이 필요하지 않다(10:20).

중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유한한 인간을 무한한 하나님의 보좌와 묶어 주는 금사슬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를 분주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사들인 그 사람의 탄원을 받으신다.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은 자신의 의를 진실한 기도자의 편에 두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기도는 인간 탄원자의 기도와 섞인다”(엘렌 G. 화잇, That I May Know Him, 78).

 

<부가설명>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함께 앉으심으로 은혜의 왕으로 즉위하셨다. 이 사실을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잘 설명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2:33)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5:31) 오순절은 예수께서 은혜의 왕으로 즉위하실 사실에 대한 예언적 절기이다. 예수께서는 은혜의 보좌에 앉으시고 그 이름을 의지하여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사유와 생명을 더하신다. 그래서 예수께 나아가는 자들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되는 것이며 그 생명으로 하루하루를 거룩하게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는 자들이 되며 당당히 나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3:12)

 

교훈 :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하늘 대제사장으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 기도로써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날() 정결하고 진실한

1223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1. 10:22을 읽어 보라.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정해진 조건은 무엇인가?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아래 참고에 답이 잘 정리 되어 있다. 1. 참마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2.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3. 악한 양심으로부터 뿌림을 받은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4. 맑은 물에 씻은 몸으로 나아와야 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예배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1. 참마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마음이란 우리의 내적 존재, 즉 우리의 생각, 동기, 감정, 의지 그리고 품성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하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정결하게 되어야 진실해질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완전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 품성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2.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어제 공부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권한이 있는지 의심할 더 이상의 이유는 없다.

3. 악한 양심으로부터 뿌림을 받은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마음에 뿌림을 받는다는 표현은 광야에서 백성에게 뿌린 피를 가리키는 성소 언어이다(24:8, 8:23~24). 동물의 피는 제의적인 정결을 줄 수는 있었지만 백성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는 못했다(9:9, 13). 그러나 하늘 참장막의 정결은 그리스도의 피가 가져다주는 양심의 정결이다(9:14). 이러한 정결은 회개한 죄인에게 부여되는 칭의의 상징이다. 우리는 용서받았기 때문에 양심이 깨끗하다.

4. 맑은 물에 씻은 몸으로 나아와야 한다. 이는 마치 침례식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좀 더 영적으로 이해해서, 성경을 읽고 그 교훈을 삶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으로 깨끗하게”(5:26) 되는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4:7~8에서 야고보는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의 태도 때문에 고민한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집중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타협하자 곧장 위험에 빠졌다. 야고보는 이때 성소 정결과 관련된 언어를 사용한다. 오직 정결함이 있어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권면은 진정으로 성소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4:7~8).

 

<부가설명> 말씀을 강론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대하여서는 자주 말하지만 뿌린 피에 대하여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복음을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거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피 뿌림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모든 아담의 후손을 위한 것이다. 차별이 없다. 그러나 그 흘린 피를 자기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뿌리는 피이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신 구원의 봉사에 반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반응하지 않으면 비록 구원을 베풀어놓으셨지만 그것을 스스로 적용하지 않는 것이다. 속담에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고 하지 않는가. 예수께서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갖추어놓았어도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되지 않는다. 뿌린 피는 바로 흘린 피의 공로를 믿고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에게 적용해 주시는 피이다. 이것을 바울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4:10)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이시다. 그러나 특히 믿는 사람의 구주이시다. 즉 흘린 피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믿는 자에게 그 피를 뿌려서 정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10:22에 뿌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교훈 :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실한 마음, 온전한 믿음, 깨끗한 양심 그리고 씻은 몸으로 하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셋째 날() 믿음 : 확신하라

122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0:19).

10:19~25을 다시 읽어 보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한 주제는 다름 아닌 확신이다. 그리스어로 확신은 담력”(10:19), 용기, 겁 없음을 뜻하며 신약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원래 이 단어는 솔직하게 말하는 태도를 뜻했다.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 말은 특히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유형의 솔직함은 긍정적인 확신을 더한다. 우리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접근 권한에는 제한이 없다. 우리 자신이 원치 않거나 또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이런 권한을 가로막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늘 성소에 언제나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을 받았다.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런 확신은 우리 자신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1. 히브리서에는 다음과 같이 확신에 관하여 말하는 여러 성경절이 있다. 3:6, 14, 4:16, 6:11, 11:1. 이 말씀들은 어떤 종류의 확신에 대하여 설명하는가?

[3:6,14]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확실함을 가지고 주 안에서 담대히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르친다.

 

이런 확신은 우리의 생각을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께 고정하게 한다. 이러한 조건은 우리의 어떠함이 아닌 중보자의 어떠함에 의존해 있다. 흥미롭게도 신자들이 온전하지 못한 확신(믿음 또는 소망)을 가지리라는 언급은 없다(6:11, 10:22). 단언컨대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구적으로 열어 놓은 새로운 길은 틀림없이 우리를 온전한 확신으로 인도할 것이다. 불완전한 확신은 없을 것이다.

확신을 얻고 유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믿음을 통해서이고(3:12)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신실한 봉사를 통해서이다(딤전 3:13). 두 가지 방법 모두 필요하며 중요하다. 히브리서에서도 믿음의 확신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라는 권면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신앙과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부가설명> 확신이라는 말에는 불완전이라는 단어가 붙을 수 없지 않겠는가. 교훈에 기록한 말대로 이 확신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분 안에 있을 때에 보증된 확신이다.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고 강권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셨고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승천하셨다. 승천하신 사실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6:10)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중보가 되사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그의 흘린 피를 뿌려주시며 나의 피, 나의 피라고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의 구원의 봉사를 받으시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8:33,34)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예수를 거절하거나 떨어져 나가지 않는 한 우리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엄청난 고통을 감당하셨는데, 그 결과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한 것이다.(11:6 참고)

 

교훈 :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런 확신은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서 온다.

 

 

넷째 날() 소망 : 굳건하게 흔들리지 말라

1225

 

1. 아래 성경절들을 찾아보라. 공통점은 무엇인가? 신자들은 무엇을 고수해야 하는가?

[3:6] “우리의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4:14]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0:23]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 공통점은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잡힌바 된 그것을 굳게 잡는 수고를 해야 한다.

 

구원의 확신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간직하는 것도 중요하다. 히브리서는 소망을 굳게 붙잡으라고 진지하게 호소한다. 어떤 신자들이 믿음과 소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해야 했다. 그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 즉 소망, 자랑, 확신, 도리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이 모든 말들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신앙을 말한다. 우리는 그 말대로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우리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대한 진리를 잃는 순간 우리는 확신도 잃게 될 것이다.

위의 말씀은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3:14)으라고 강권한다(3:6, 14, 6:11). “움직이지 말”(10:23)라는 표현은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말한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소망은 동일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심은 변치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이 신실하며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은 지키신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고(4:19~21 참고), 그리스도의 초림의 약속을 지키셨으며(3:19),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도 지키실 것이다(12:26).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분은 그것을 창조 이전에 약속하셨다(1:2, 요일 2:25).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의 불신실함과 불신앙이 우리를 위한 그분의 목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분의 약속들은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다. 그 약속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까닭은 신실함이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나의 확신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신 하나님의 확신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대신하여 사망을 당하게 하셨겠는가. 그분은 독생자의 희생으로 아담의 후손들이 구원받을 것을 확신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자기의 선행과 말씀을 순종한 여부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도 그것은 더러운 옷과 같다. 그런 우리를 그의 피로 정결하게 하셔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히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그것을 우리는 굳게 붙잡아야 한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있다. 그분을 바라보고 소망으로 즐겁게 생활하는 모든 신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고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재림교인들은 자기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잘못된 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의 생명이고 의이며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아멘.

 

교훈 :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말고 굳게 붙잡아야 한다.

 

 

다섯째 날() 사랑 : 서로 격려하라

1226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4~25).

 

10:23의 권면이 개인의 태도에 초점을 맞췄다면 히 10:24은 신자들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길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꾸준히 다른 사람도 돌봐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과제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인 삶의 일부분이었다(13:34~35, 5:13).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돌아보는행위는 집중적이고 자상한 사고가 필요하다. 이 말씀은 동료 신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착한 일을 하도록 격려할 방법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도록 격려하기보다 분노와 반감을 사기가 쉽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우리의 사랑의 장려로 인하여 사랑하며 선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10:24~25을 읽어 보라. 사랑과 선행은 모임과 무슨 관계인가?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사랑과 선행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이는 것은 사랑과 선행을 수행할 대상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강조점은 우리가 모임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배에 나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이룰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모임에 오지 않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다. 결국 그들이 모임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다. 누구나 원하면 교회 출석과 모임을 피할 핑계들을 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핑계들은 다른 이에게 복이 되기 위하여 교회와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이유에 비하면 궁색할 따름이다.

그와 같은 행동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더 중요하다. 10:19~25 서두에서 저자는 신자들에게 하늘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 주의 날이 그들에게 가까이 이르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항상 신자들의 행위를 결정짓는 주된 동기가 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며, 모든 교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온 세상의 진리교회의 성도들은 지체로서는 여러 사람들이지만 교회로는 오직 한 사람이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예수님이 그 머리이다. 성경은 지체가 서로 돌본다고 말한다. 성경이 아니라도 우리의 몸을 보면 지체들이 서로 돌보는 것은 생리가 아닌가. 교인들이 흩어져 살아가도 교회라는 몸으로서의 공동체에 지체의 직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지체가 자기 기능을 올바르고 건강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그 몸은 고장이 난다. 아픈 것이다. 예수님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지체가 서로 돌보는 정신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지체를 건강하게 하고 생명력으로 충실하게 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상대를 살려주려는 정신이 없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모이기를 자주하고 서로 격려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는 신앙도리이다.

 

교훈 :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주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웠으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모이고 서로 사랑하며 믿음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여섯째 날()

1227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중보자는 그분의 지위와 사역에 있어서 지상의 표상적인 제사장직에 비하면 훨씬 큰 위엄과 영광을 갖추셨다. 구주께서 중보자가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과 그의 백성 사이에 서야만 하셨다. 이런 섭리로 인하여 길이 열렸고, 죄인들은 그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접근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자격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과실이 있을 뿐 아니라 소유한 것 이상의 공로도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합당한 제물을 드림으로써 길을 열 수 있었다. 그분은 완전하셨고 죄로 인하여 오염되시지 않았다. 그분은 점도 없고 흠도 없었다. 무한한 가치의 치유책이 제공되지 않았다면 죄의 끔찍한 결과가 어느 정도인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예언의 신 2, 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히브리서 전체를 훑어보십시오. 이 책에서 줄곧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따라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 되심과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에 이룬 속죄와 봉사로 믿음으로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권한이 있다는 사상을 묵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런 생각은 우리의 삶에, 특히 유혹과 절망의 시대에 사는 우리의 영적 상태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그것은 죄가 용서받고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믿음의 온전한 확신과 경솔한 과신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온전한 확신은 말씀에 근거한 검증된 믿음이지만 경솔한 과신은 자기의 정서적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엄격히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무한한 가치의 치유책이 제공되지 않았다면 죄의 끔찍한 결과가 어 느 정도인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글은 죄가 얼마나 심각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까? ‘무한한 가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창조주시라는 사실은 이 같은 놀라운 진리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다른 이에게 전하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 우주의 창조주이신데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것은 어떤 값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이다. 이것을 참으로 깨달으면 우리는 말씀을 따라 중생하고 주님과 같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적 친교를 발전시켜서 더욱 사랑하고 착한 일을 행하며 살도록 서로를 격려할 수 있을까요?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어떤 영적 축복을 얻습니까? 동료 신자들과 함께 예배하지 못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며 이런 경험은 서로 사랑하는 능력의 기초가 된다. 함께 모이면 이런 사랑을 나눌 수 있지만 분리되면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