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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수요일 - 거꾸로 뒤집힌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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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 4).

이런 말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확실히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 설교자는 아무래도 세상 사는 이치를 터득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정치적으로도 기민하지 못하고 있고 세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련한 홍보 전문가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에 대해서 듣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공적인’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과 사상을 전해야 합니다.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혹은 “심령이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같은 기별에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사실은 거기 있는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가 설교로 군중을 이끌고 싶었다면, 그는 세상 방식에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던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같은 말로 시작되는 메시지는 사람들의 시선조차 끌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큰 사회에서 인정하는 성공은 절대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전통적인 가치와 예수 사이에 마찰이 일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존경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조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의 메시지는 큰 문화의 기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실, 팔복은 세상의 가치 체계를 뒤엎어 놓았습니다. 세상의 가치 체계가 팔복에 의해 전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복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왕국을 급진적인 것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시민 역시 급진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급진성이야말로 팔복과 산상 수훈 그리고 신약 성경 전체의 출발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말들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한 것이며,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세상 사이에서, 예수의 가치들과 세상의 가치들 중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저의 교회는 너무나도 ‘정상적인’ 것입니까? 당신께 ‘복 받은 사람들’ 속에 포함될 수 있도록 저로 하여금 세상의 관점에서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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