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비행기 문이 닫히려는 순간, 나는 허겁지겁 마지막 승객으로 겨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LA 출장을 마치고 시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손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일감들로 꽉 차 있는 가방을 들고 내 좌석번호를 두리번 거렸다.
새해가 되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하는 일로 나는 마음이 급했다.
좌석을 찾는 동안 마음속으로 제발 내 옆자리가 비어 있어 밀린 일들을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찾은 내 자리는 통로쪽이었고,
창문 쪽에는 비즈니스우먼 같은 여인이 신문에 코를 박고 있어 별로 방해 받을 것 같지 않았다.
내 바로 옆자리의 어린 소년은, 목에 빨간 꼬리표를 달고 조용히 앞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 꼬리표에는 ‘동반자 없이 여행하는 어린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손은 양 무릎 위에 얹어놓고 얌전하게 앉아서,
마치 ‘모르는 사람과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아요’라는 지시라고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잘 되었군!’ 나는 속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 곧 해야 할 일들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여 승무원이 다가와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마이클, 비행기가 곧 이륙하기 때문에 나는 의자에 앉아야 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혹 도움이 필요하면,
네 옆에 앉아 계신 이 신사분께서 도와주실꺼야. 그렇죠?”라며 승무원은 나를 쳐다보았다.
꼼짝없이 내가 이 아이의 보호자가 된 셈이었다.
하는수 없이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아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이, 내 이름은 제리야, 네 이름은 마이클이라고 했지? 너 한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데, 맞니?”하고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마이클이 “아지씨는 분명히 아이들이 없나보군요.”라며 의외의 답변을 했다.
“아니, 왜? 나도 아이들이 있지, 사진 볼래?” 나는 얼른 지갑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다 커 버린 사진을.

“왜냐하면은요, 내 나이를 못 맞추셨잖아요. 나는 지금 여섯 살이거든요.”
“아하하 네 나이를 정확히 알아맞히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 때 마침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기내에 있는 모든 분들은 이륙 준비하십시오.” 나는 습관대로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이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무사하게 도착하도록 도와주세요.” 내 기도가 끝나자, 마이클이 “아멘” 하였다.
그리고는 곧 이어 “나는 죽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우리 엄마가 벌써 하늘에 가 있거든요.”라는 것이 아닌가?
“아, 그래? 안 됐구나.”
“안 됐다니요? 나도 죽으면 하늘 나라에서 멈마를 만날 수 있잖아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엄마 없이 혼자 살아야 하는 네가 안 되어서 말이야, 아빠는? 아빠는 어디 계시는데?”
“나는 아빠 같은 사람 없어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걸요.” 마이클은 서슴없이 내 뱉었다.

겨우 여섯 살박이가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도 없이, 혼자서 먼 여행길을 떠나다니 너무나 애처러운 생각에,
도착지까지 외롭지 않게, 즐거운 여행이 되게 해 주고 싶어,
무릎 위에 올려 놓았던 손가방을 슬며시 의자 밑으로 내려 놓았다.

“이 비행기에 화장실이 있나요?” 몸을 움직이며 마이클이 물었다.
“있지, 물론 내가 데려다 줄게.”
나는 마이클이 기내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문을 열고 닫는 방법과
손을 씻기 위해 버튼을 눌러 물이 나오게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문 밖에서 기다렸다.
얼마 후 마이클은 온통 젖은 셔츠를 털며 나왔다.
“물이 왈칵 쏟아지는 바람에... 헤헤헤” 마이클이 밝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마이클은 식사 시간에도 귀빈 대접을 받았다.
승무원이 천으로 된 냅킨을 목에 둘러주고, 식탁받이에도 천으로 된 깔개를 깔아주었다.
‘무엇을 먹겠느냐, 고기를 얼마나 익힌 것으로 줄까? 주스는 얼음을 넣어줄까? 아니면 얼음없이 마시겠느냐?’

컴퓨터를 꺼내 일을 조금이라도 해야겠는데 자꾸만 마이클에게 신경이 쓰였다.
마이클 발 밑에는 누런 그로서리 봉투가 좋여 있었다.
“저 봉투 안에 든 것이 내 전 재산이에요.” 마이클이 조용히 속삭였다.
불쌍한 아이같으니라고! 가슴이 갑자기 막막해왔다.

이 때다. 여 승무원이 마이클에게 오더니 “마이클, 저 앞 조종실을 구경 시켜줄까?”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마이클이 조종실 구영을 떠난 뒤, 다른 여 승무원이 내게 와서 말을 건넸다.
마이클과 친구가 되어 감사하다며, 시카고에 내리면 마이클 할머니가 마주 나올 예정으로,
좌석 앞에 꽃혀 있는 이 서류 봉투는 후견인인 할머니에게 보내질 법적 서류들이라고 알려주었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마이클은 기분이 좋아서 마냥 떠들어댔다.
조종사들에게서 받아 온 여러 가지 먹을 것과 카드를 내게 자랑하며 뽐내고 떠들더니 차츰 시무룩해지면서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는 앞 좌석 뒤 주머니에 꽃혀 있는 서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마이클, 무슨 생각을 해?” 내가 물었으나 답이 없이 조용했다.

얼마 후 마이클이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은 내 평생 처음 보았다. 너무나 애절한 울음이었다.
마이클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무슨 일이야? 마이클, 왜? 왜 우는데?”하며 나도 그만 목이 메었다.
“나는 할머니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엄마는 우리가 고생하는 모습을 할머니에게 보여 드리면 안 된다고 못 오시게 해서 서로 얼굴도 모르거든요.
할머니가 날 싫어 하시면 어떻게 하죠?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해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마이클의 등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마이클, 너 혹시 크리스마스 이야기 들어 보았니?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예수 이야기 말이야,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 전, 아주 추운 날,
마리아는 아기 낳을 곳이 없어서 말이 밥 먹는 구유에 아기 예수를 낳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시고 축복하셔서 잘 자라 우리의 구주가 되신 아기 예수 이야기 들어 보았지?”

“아, 생각나요! 아기 예수, 나 기억해요. 엄마가 데리고 간 교회에서 들었어요.”
“그러더니 마이클이 눈을 감고 머리를 들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예수 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모든 승객들은 마이클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마이클은 크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와! 여기 저기서 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이클, 네 목소리 정말 아름답다. 너처럼 노래를 멋있게 부르는 아이는 처음 본 것 같구나.”
“우리 엄마가 늘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목소리를 주셨다고 했어요.
할머니를 닮았대요. 할머니도 교회에서 늘 독창을 하신대요.”
“너도 교회에 할머니랑 다니면서 독창하면 좋겠구나, 꼭 그렇게 될 꺼야. 마이클.”

곧 시카고에 착륙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 나오며, 좌석 벨트 표지판에 불이 꺼졌다.
승무원 한 사람이 다가와서 마이클에게 도착 1분 전이라고 알려주었다. 잠시 후,
승객들이 짐을 꺼내기 시작하며 삽시간에 기내가 소란해졌다.

나와 마이클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마이클이 내게 속삭인다. “나와 함께 내리실 거에요?”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는 누런 그로서리 봉투와 서류 봉투를 집어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꼬옥 잡은 마이클과 나는 승무원을 따라 출구쪽으로 나갔다.

오헤어 공항 복도에는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마이클이 갑자기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빼고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의 입술이 떨리며 눈에는 눈물이 잔뜩 오여 있었다.
“무슨 일이야, 마이클, 무겁니? 내가 들어 줄까?” 마이클은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려다 그냥 흐느꼈다.
나도 복도에 주저앉아 마이클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이가 내 목을 껴안았다.
그의 따듯한 체온이 느껴지며 아이의 슬픔이 내게 전해 왔다.
“마미, 마미, 마미...” 아이가 내 목을 부여잡고 속삭이는 소리가 내 가슴에 젖어왔다.
마이클을 일으키려 해도 아이는 내 목을 놓지 않고 더 힘 주어 매달렸다.
그 때다. 급히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아가야, 너니? 마이클?” 목소리만으로도 따듯함이 전해 왔다.

“오 아가야! 이리온, 할머니는 마이클을 사랑해요. 널 안아 줄게. 그분의 목을 놓아드리렴.”
할머니도 무릎을 굽혀 주저 앉았다. 그리고 마이클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저 밖에서 너를 기다리는 친척들이 많은데 그곳으로 가야 해요.
너의 이모, 삼촌, 사촌들이 다 와서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어서 할머니에게로 와야지...”
하지만 마이클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목을 껴안은 채...
할머니는 빼빼 마른 마이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역시 아름다운 음성이었다.

일절이 끝나자, 마이클은 내 목에서 손을 조용히 빼더니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마이클은 내게 “안녕!” 하면서 눈물 젖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얼른 그의 목에 걸려 있는 꼬리표를 떼어 주었다. God bless you! - 미주지남 11월호/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