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자매의 맏이로 태어난 나는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을 위해 1972년,
열아홉 살 나이로 파견 간호사가 되어 독일에 왔다.
한국에서 겨우 중학교를 졸업한 내가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해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간호사로 근무하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렇게 2년간 주말이나 방학, 휴가 기간에도 쉬지 않고 일하며 공부한 덕분에
1978년 튀빙겐대 의과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81년 같은 대학에 다니던 독일인과 결혼했다.
중요한 의사국가고시를 준비하며 아들 얀을 낳았고,
뇌종양 수술을 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천신마고 끝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도 땄다.
대학생이자 어머니, 그리고 아내라는 세 가지 역할을 한꺼번에 하느라 몹시 힘들었지만
내 꿈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한 지 5년 만에 병이 재발하여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고향같은 푸근함을 주던 남편을 잃은 뒤 나는 더 열심히 일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인병원을 개원하여 생활의 안정을 찾아갈 무렵 남편을 앗아간 병이 내게도 찾아왔다.
뇌종양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남편이 고생했던 일이 떠올라 두 배로 힘들었다.
기적적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회복해 다시 병원을 운영했지만 2007년 척추암이 발병했다.
스스로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암이 또 어디로 전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국 병원 문을 닫고 치료를 시작한 나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고, 지금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동안 나는 자주 예외에 속했다. 한국에서는 맏딸로서 아들 노릇을 해야 했고,
독일에서 공부할 때도 눈에 띄는 외국인 학생이었고, 결혼에서도 예외적인 부부였다.
의사들이 몇 백 명 모이는 곳에서도 나는 예외였다.
확실한 점은, 예외이기 때문에 평범하기보다 굴곡있는 삶을 살았고 좋고 나쁜 인생 경험을 두루 겪었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내게 찾아온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랑의 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등록금 없이 의대에 다닐 수 있었던 독일이라는 나라로부터 받은 사랑,
독일인들과의 국경을 넘어선 인간적인 사랑, 또 남편과의 사랑....
이렇게 소중한 사랑의 끈들에 의지하며 가슴속의 꿈을 잃지 않는 한,
눈앞에 닥치는 어떤한 시련도 슬기롭게 극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나 가슴속엔 꿈이 있다/이영숙/재독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