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신문에 기고되었던 내용에 주석을 덧붙여 씁니다.

참고로 삼육대학 신학과 1989년 제78회 졸업 후 목회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청각장애로 인해서...하지만 그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쓰실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본 내용은 201년 4월 27일자 재림신문에 실린 내용을 권정행 목사님의 부탁으로 추려내어 조금씩 올립니다.

 

people -조명신 장로(46.서중한합회 일곱빛농아인교회)

 

듣는 자와 못 듣는 자 사이에 서서

 

장애인 선교 위해 남은 인생 쏟을 터

 

4월 20일(수) 장애인의 날. 280만 명에 달하는 한국 장애인의 인권 신장과 사회적 편견 개선을 위한 각종 종교 단체 및 인권단체들의 시위와 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주요 언론매체들도 장애인 특집을 편성.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재림교회는 너무나 ‘조용한’ 장애인의 날을 보냈다. 재림교회 내 장애인은 아직도 외계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일까.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재림교회가 내부에서 조차 장애인 선교에 무관심함을 직시하고 의식의 변화를 위해 외롭게 투쟁해 온 이가 있다. 2011년 장애인의 날. 일곱빛농아인교회 조명신 장로를 만났다.

 

조명신 장로가 장애인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이 청각장애인이 되면서부터다. 서울삼육초등학교 재학 시, 감기가 호전되지 않아 병원을 찾았고 의사의 처방대로 폐렴 약을 6개월간 복용했다. 의사의 말만 믿고 6개월간 독한 약을 복용한 결과 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후 관련 최고 전문의를 수소문해 진단을 받은 결과 “전반적인 상황으로 볼 때 오진으로 인한 약물 복용을 했으며, 그 약을 장기 복용했을 경우 청력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러나 때는 늦어 대학 재학 시절 완전히 청력을 잃었다. 감성이 예민한 시절, 귀로 접하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이다.

 

시조사 현대화의 주역

청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조 장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복음사역에 투신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유력 일간지로부터 취직 제의가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당시 시조사 사장이었던 이보덕 장로의 요청으로 시조사에 입사했다. 교단 내 컴퓨터 전문가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컴퓨터 기술에 능통했던 조 장로가 시조사 현대화 작업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당시는 일일이 금속 활자를 조합해 인쇄판을 만들던 시절. 조 장로가 시조사 전체 시스템을 컴퓨터 중심 전산 체계로 탈바꿈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당시 시조사 편집국장이던 천세원 목사의 권유에 따라 편집실에서 복음의 글들을 다듬는 사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교지 편집을 하며 연마된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 이를 계기로 복음을 담은 창작의 즐거움에 빠졌고 그의 글들은 국내 유수의 글쓰기 대회에서 인정받았다. 그는 지금도 읽고 쓰는 사역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영혼의 귀에 속삭이는 하나님

조 장로는 자신의 청각 상실을 장애인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초청으로 받아들였다. 청력을 상실하기 전까지는 장애인들이 느끼는 차별과 서러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작 청력을 잃고서야 없어 보이던 장애인들의 아우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청각장애인들을 포함한 장애인들에 대한 그의 깊은 공감은 국내최대 장애인 동호회 부운영자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교단 내 장애인 선교와 인식 개선 사역에도 눈을 돌리게 했다. 삼육대학교 수화강의 개설, 전국위성전도회 수화통역 등의 변화들은 조 장로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들이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신 예수님의 모본을 조금이나마 따르려는 노력이 신앙과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장애인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경험하던 차에 하나님께서는 조 장로에게 청력을 되돌려 주셨다. 2005년 8월 16일 한국 성인 최초로 시행된 인공귀 수술로 청력을 되찾게 된 것. 조 장로는 “하나님께서 청력과 함께 새로운 사역을 주셨다. 바로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하나님과 복음 사역을 하는 것”이라 고백했다.

 

장애인 선교는 우리의 사명

조 장로는 280만 장애인들도 세천사 기별을 마땅히 접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라 주장했다. “삼육재활원을 통해 전국의 장애인들은 재림교회를 알고, 또 우리와 가까워지고 싶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렵게 재림교회를 찾은 장애인들이 직면하는 것은 “소문으로 들었던 따뜻한 섬김보다는 차가운 무관심의 벽”이다. “많은 장애인들이 한두 번 교회에 발을 들여 놓다가 미안해서 못가겠다고 한다.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처럼 느껴져 오히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조 장로는 장애인들이 재림교회에 바라는 것은 “물질적 지원보다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라 말한다. 뭔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천되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곽상욱(redchin@hanmail.net)

 

추가 해설-

초등(국민)학교 5학년 때 서울위생병원, 지금의 삼육의료원 소아과에서 오진으로 폐렴 약이 아니라 결핵약을 6개월 주사와 함께 복용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명 마이신 중독으로 인한 청각신경세포 손상으로 감각신경성 난청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오진에 대한 배상이라는 것이 없어 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국내 최대 장애인동호회는 하이텔 두리하나 동호회입니다. 두리하나라는 동호회 이름도 제가 지었고 또 유니텔의 장애인동호회 다솜나래도 제가 지었습니다. 당시의 천리안의 장애인동호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활동해서 김갑선 대표운영자 때 부운영자로 활동했고, 하이텔 꿈따라지 명예기자로 1999년까지 활동했습니다.

 

인공귀 수술이 아니라 인공와우 수술입니다. 2005년 8월 16일 1차 수술과 2007년 3월 20일 2차 수술로 한국최초의 성인 인공와우 양이수술을 받았습니다. 집도하신 분은 지금의 일곱빛농아인교회의 장로님이신 전영명 장로님이십니다.

 

또한 꼭 서두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친구 중에 엄덕현 목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위성방송전도회에서 수화통역 화면이 나오기 어려웠겠지요. 자리를 빌려 친구 엄덕현 목사에게 많은 감사를 전합니다.

 

기억 남는 장애인 중에 위생병원교회(삼육중앙교회) 출석하시던 한 장애인이 생각납니다. 휠체어를 타고 오셨다가 올라가지 못해 집사님들이 휠체어를 들고 다니셨습니다. 경사로가 없는 재림교회 최대의 교회라는 이야기에 목회실에 제안하게 되었고 목회실에서는 직원회의 끝에 경사로를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경사로 만들어지기 전에 너무 미안하다며 다른 교회로 가셨습니다. 다시 찾아 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교회를 살펴보니 연합회도 경사로 등 없고 교회는 소형교회가 대부분이라 장애인출입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 개선을 얼마나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각 교회마다 수화통역자 한분이라도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지금 기관에는 수화통역자가 있는 곳은 대학과 시조사 뿐일 겁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을 제대로 안 지키는 곳이 우리 교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