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 작품 <마지막 잎새>가 생각난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사는 화가 지망생 존시는 폐렴에 걸려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어 삶을 포기한 채 창밖 담쟁이 잎만 세고 있다. 마지막 잎 새가 떨어질 때 자신도 함께 죽게 될 거라고 말하는 그에게 친구가 살려는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 갖게 온갖 노력을 쏟지만 소용이 없다. 그들 아래층에 화가 베어먼 노인도 살고 있다. 평생의 걸작을 꿈꾸며 살고 있지만 현실에 막혀 싸구려 광고물을 그리며 근근이 살아간다. 어느 날, 밤새도록 세찬 비와 사나운 바람이 불었다. 다음 날 아침 창문을 열어 보니 담 벽에 담쟁이 잎사귀 하나가 그대로 붙어 있다. 이틀째가 되어도 마지막 잎 새가 여전히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이를 본 존시는 살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의사가 존시의 완쾌를 알려주던 날 친구 수는 비바람이 불던, 날 담 벽에 담쟁이 잎 하나를 그려 넣은 사람이 베어먼 노인이었고, 바로 이 일로 폐병을 얻어 숨졌다고 말한다.

  

   논어 12권 10장에 애지 욕기생(愛之 欲其生)이란 구절이 나온다.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란 뜻이다. 비록 자신에게 희생과 아픔의 손실이 있다 해도 말이다. 이런 인생관을 보여준 인물 중 하나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도르가(행9:40)다. 귀하고 유능한 제자였다. 욥바 교회가 그 지역에서 인정받고 전도의 탄력을 받아 성장한 이유엔 그녀의 존재와 봉사가 있었다. 가난하고 슬픔을 당한 이에게 친절과 열정으로 다가갔고 심적⦁영적으로 지친 자들에게 말씀의 위로를 전달했다. 혀보다 솜씨 있는 손가락이 더 활동적이었던 도르가의 숨이 멈추었을 때 욥바 사회와 교회에 소망이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멈춰버린 재봉틀을 다시 돌려 가나한 자와 고아들에 웃음과 희망이 되라고 하나님이 다시 그녀를 살리셨다.

  

  사회와 이웃에 사랑과 축복이 되는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은 귀히 보신다. 도르가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된 구제의 본을 보였다. 구호품이나 재정만이 아닌 친절한 마음과 사랑의 미소를 함께 전달하는 것을 잊지 말라 하신다. 참기 어렵겠지만 생색 내지 말고 오른 손의 선행을 왼손에게 들키지 말라 하신다. 사람들이 여유와 남는 것으로 타인을 도울 때 비록 궁핍한 현실 가운데 있다 해도 그들의 필요에 응하라 하신다.

  

  교회의 복음 증거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복음 전파와 사회사업이다. 복음 전도가 개인 적인 측면이라면 사회사업 및 봉사는 그룹과 단체가 참여하는 방법이다. 사회봉사(사업) 없는 복음 전파는 반쪽짜리며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꼴이라 칭한다.

 

   칼 막스가 1848년 공산주의 선언과 유물사관을 통해 사회 혁명을 외칠 때,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스는 복음과 구제를 통한 사회 평화를 주창했다. 1912년 8월 20일 윌리암 부스는 큰 아들을 불러 놓고 그의 생애 마지막 유언을 했다. “사랑은 모든 것이다(Love is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