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40도가 아니면 추위라 말하지 말고, 4000킬로를 넘지 않으면 멀다 하지 말라는 러시아 격언이 있다. 그곳의 사계는 겨울부터 시작된다. 인생의 사계가 겨울부터 출발한다 해도 불평 없었으면 좋겠다. 봄으로 시작해 겨울로 끝나는 삶도 있고 겨울로 출발해 가을로 마치는 인생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눅 17:17). 열 가운데서 여덟이나 아홉이 거의 예외 없이 그럴 것이라는 한자 숙어가 십중팔구다. 예수님 당시 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본문의 이들처럼 극적으로 회복된 경우는 드물었다. 대다수는 격리수용, 단절이란 보편적 수칙에 적응하면서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열 명은 달랐다. 병 때문에 많은 기회를 놓쳤고, 냉혹한 현실에 분노 치밀어 오른 적 한 두 번 아니었다.

 

      자꾸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수용하자, 자신들이 해야 될 일을 볼 수 있었고 결국,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환경에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분명 이들과 달리 행동했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미리 그어놓고, 그곳에 머물며 자신감 넘치는 도전 한 번 없이 주위만 탓했을 것이다. 허나, 이들은 무력감, 패배감을 극복하고 주위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자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계획만 세우고 행동치 않는 사람과는 분명 차이를 보였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믿음에 찬 결단을 내린 후 그 분께 내달렸다. 발걸음에 힘이 실렸고, 무거운 인생의 짐이 가볍게 느껴졌다. 박노해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 노래했고, 장영희 교수는 문학의 숲을 거닐다 에서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는 사람만이 절망이기도 하다” 고 시인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한다. 고작 30센티도 안 되는 이 거리를 평생 오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결심과 의지만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부지런히 손과 발을 움직이고 주신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변화를 경험케 된다.

 

     이것이 운명이라 절규하던 그들이 예수님만이 희망이라 외쳤다.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14절). 낫지도 않는 몸으로 제사장에게 가라는 말씀이 만약, 다른 그룹에게 선포되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실망과 망설임으로 포기했을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열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껏 모두, 견실한 신뢰와 희망으로 잘 지탱해 왔다. 사실은 그 다음도 중요했다. 모두 다 깨끗함을 받았지만, 결과는 오직 한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나머지 아홉처럼, 필요충분조건에서만 주님께 향하는 경향이 우리에게도 있다. 부족함 느끼고 아쉬울 땐 하나 되어 매달리지만 문제 풀리고 만족 느낄 땐, 각각 흩어져 제 길로 갔다. 쉽게 변하고 떠나는 가벼운 모습이다. 사마리아인이 부러운 세대에 살고 있다. 십중팔구(十中八九),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