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4 장

문제의 뿌리

왜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이 실제로 종교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

이 문제는 기원에 대한 믿음이 전체적인 세계관과 삶의 의미 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우연한 무작위적 과정의 산물이며 결국 절대적 권위는 없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 없다면 처벌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원하거나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진화론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규율을 정당화시키게 해주는 종교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율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우리 모두는 같은 죄로 고통받고 있다. 즉, 절대적 권위에 대한 반역. 진화론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소위 “과학적” 정당성이 되어왔다.

성경은 기원과 지구상 생명체의 초기 역사에 관한 참되고 확실한 설명이 창세기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점점 많은 과학자들이 성경을 기반으로 삼고 과학과 역사의 모델들을 그 위에 수립하면 살아있는 동식물과 화석, 문화들에서 오는 모든 증거들이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 사실은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신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물론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반대한다. 그들은 기도와 성경 통독, 창조론 교육을 공립 학교 과정에서 빼앗아 내기 위해 투쟁한다. 인본주의자들은 대중을 기만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종교를 제거함으로써 학교를 중립적인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라고 믿도록 만든다. 한 마디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인본주의자들은 공립 학교에서 종교를 제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제거했으며 하나님을 반대하는 종교인 인본주의를 대신 채워넣었다.

대부분의 공립 학교들은 인본주의라는 종교 안에서 대를 거치며 학생들을 훈육하는 기관이 되어버렸다. 그런 공립 학교의 흐름 가운데서 소수의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그러한 기관들에서 “세상의 소금”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일은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또한 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그러한 이방 환경가운데서 일관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빛을 말 아래 숨기고 있다. 어떤 교사들은 교육 기관에서 그리스도인 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알려지면 해고당할 것이라는 위협마저 받고 있다.

진화론이란 종교가 완전히 다른 신앙 체계에 의해 공격받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 걸쳐 창조과학 사업에 대해 극단적인 감정 본위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감정은 창조 반대론자들이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호주 자연사지 21권 1호에 나온 마이클 아쳐박사(뉴 사우스 웨일즈 대학 동물학 선임 강사)의 인용문을 생각해보자: “과학적 창조론은 단지 오류일 뿐만이 아니다; 과학적 창조론은 어의없을 만큼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 이론은 인간 사고의 역겨울 만큼 서투른 모방이며 인간 지성의 노골적인 오용이다. 한 마디로 신봉자들에게 있어 과학적 창조론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명해야만 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싸움은 기독교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한 진화론자인 강사가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진화론이 종교라는 사실을 제게 결코 확신시킬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화론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더라도 그는 진화론이 종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음엔 그 믿음이 맹목적인 믿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진화론은 단지 과학적이고 하나님을 믿는 일은 단지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대중은 그릇된 가르침을 받고 있다. 진화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의 하나님의 진리를 나누려 할 때 많은 사람들을 비틀거리게 하고 귀를 돌리게 한다. 창조과학 사업에 대한 인본주의자들의 반대에서(논쟁이나 미디어, 책 등을 통한) 여러분은 그들이 진화론을 위한 증거를 아주 드물게 인정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요 원인은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전시 중인 진화론을 위한 모든 ‘증거’를 살펴보라. 서로 다른 종류의 동식물들이 조심스럽게 보존된 표본이나 많은 화석에 의해 나타내져 있다. 여러분은 진화의 이야기를 글로써 보게 될 것이지만 여러분이 보는 물증을 통해서는 보지 못한다. 증거는 유리 진열장 안에 있다. 진화론의 가설적 이야기는 단지 유리 진열장에 부착될 뿐이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증명하는 증거 하나를 제시하기만 하면 된다. 진화론이 옳고 창조론이 무의미하다면 진화론자들은 방송매체가 손닿는 곳에 가지고 있으므로 진화론이 참되다는 사실을 만인에게 밝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을 할 수 없다. 증거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압도적으로, 정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세계에 창조론의 진실을 받쳐주는 압도적인 증거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광범위한 방송매체가 창조론자에게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자. 세속적인 진화론자들은 우리가 하는 말이 맞고 즉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면 그들의 철학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창조과학 사업을 반대해야만 한다. 그들 철학의 기반은 하나님이 없다고 선포한다.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 아니라면 유일한 대안은 창조론 뿐이다. 증거가 완전히 모순된다 할지라도 진화론자들이 진화론적 철학을 고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실제로 영적인 문제인 것이다.

혹자는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증거가 그렇게 압도적이라면 분명히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로마서 1장 20절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고, 믿지 않는 사람을 책망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세상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고 증거가 모두 있다면 왜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일까? 믿기를 원치 않기 때문일까?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날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부러 잊으려 한다고 말한다(벧후 3:5). 이 말은 그들 편에서 고의로 믿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말한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즉, 진리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보내려하지 않았던 바로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출 10:27). 이 개념은 출애굽기 7장 14절에도 기록되어 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르치시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로마서 1장 28절은 말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와 모든 증거를 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아주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 편에서 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왜 인본주의자들, 진화론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뒷받침하는 모든 증거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이 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빛에 따라서 증거가 올바르게 해석되는 것을 인정하기 거부한다.

이사야 50장 10절은 말한다. “저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주님과 구주로 신뢰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사야 50장의 나머지를 읽어보면 우리 각자는 스스로의 빛 - 인간의 빛 가운데서 걷게되길 원하는 인본주의자와 진화론자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50장 11절.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우리는 인간의 운명이 이렇게 되길 원치 않는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하신 말씀처럼, 그분은 누구도 멸망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죄를 간과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죄는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자비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서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