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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안식일 -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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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3:15)

 

포근한 날씨에 모든 일이 순조롭고 주차 공간도 완벽하고 어디서든 사람들이 미소를 지을 때는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는 하나님을 믿기가 정말 어렵다. 자연재해로 마을과 집이 파괴된다면? 남들에게 흔히 일어나던 비극이 이번에 나에게 닥친다면? 가장 신실한 교인의 자녀도 암에 걸린다. 평생 예수를 믿던 이들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끔찍한 사고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신자라고 해서 가혹하고 쓰라린 상황을 항상 모면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신앙생활에 큰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질병이나 어려움을 피하게 하는 보증 수표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후 12:7~8).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신실한 성인 도르가는 병이 들어 죽었다( 9:37, 공동). 야고보는 참수당했고( 12:2) 욥은 가족 대부분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재산도 모조리 잃었다.

우리는 살면서 당하는 문제로 하나님의 신실함을 측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디까지인지는 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여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수천 년이 흐른 뒤 예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5:8)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성령과 영생의 약속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살면서 겪는 시련은 자신의 신실함을 확인하는 기회이다. 욥은 그분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라고 말했다( 13:15, 우리말). 하나님이 특정 상황을 허락하신 이유를 항상 깨달을 수는 없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있다. 욥과 같은 증언은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우리가 그저 편한 것만 찾는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