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름시름 앓다

 

밤 깊은 케냐 나이로비 공항. 공항직원에게 사정하여 급히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남편을 위해 해열제를 구해야만 했지요. 9시가 넘어서 그런지 공항 클리닉도 약국도 모두 문을 닫은 상황. 새로 지은 청사 안에 또 다른 진료소가 있다고 하는데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려면 특별허가증이 필요하다네요. 마침 눈에 들어온 공항편의점, 다행히도 파나돌(panadol, 진통제)이 있어 하나 샀습니다. 출국일 아침부터 기운이 빠진다며 침대에만 누워있던 남편은 국경을 넘어 나이로비로 가는 6시간 내내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빠져 나가면 못 구할까 싶어 가는 길에 말라리아 약을 사서 한 알 먹긴 했는데 증상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계속 열이 오르더니 급기야 손바닥에 붉은 반점들이 하나 둘씩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약의 부작용인가 싶을 정도로 발바닥도 코 주변도 심지어는 귀도 걷잡을 수 없는 반점들로 뒤덮였습니다. 독일 드레스덴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바깥은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오후 4시 반일 뿐인데 어라, 시계가 고장 났나?’ 순간 정신이 멍했습니다. 물집이 차 올랐다 터지면서 생긴 붉은 상처들, 한걸음 걷기조차 불편해 하는 모양새, 은하와 은총이까지 열이 오르며 제 아빠와 똑같은 반점이 하나 둘씩 생겨나던 그 시각. 공항 밖으로 나가기가 어찌나 주저되던지…… 마중 나오신 유라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함께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이 모양으로 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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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구라고?

 

다행히 의사이신 유라 선생님의 남편께서 여러 정황을 보시고는 수족구란 진단을 내려 주셨습니다. ‘유치원생들 간에 잘 옮는다는 그 수족구요?’ 성인이 이 정도로 심각한 수족구에 걸린 것은 처음 보는 일이라며 이건 약도 없으니 무조건 잘 먹고, 잘 쉬라는 처방을 내려주셨습니다. 순간이동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탄자니아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전염병을 안고 독일에 왔다니 이게 무슨 민폐란 말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했던 지난 며칠간, 기내에서 찬 물수건을 바꿔 가며 연신 도움을 받았던 일하며, 첫 도착지였던 스페인에서 동생 가족의 도움으로 대학 응급실에 갔던 일(불특정 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진단만 받았음에도), 지회에 요청드렸던 독일 후원음악회용 영상이 한글과 영어 버전 모두 완성되어 독일 행 비행기 탑승 직전 다운 받았던 일, 그리고 바로 이 순간에도 천사 같은 얼굴로 가련한 병자들을 기꺼이 맞아주고 있는 유라 선생님 내외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극도로 심란한 상황일지라도 하늘의 손길이 저희 모두를 섬세하게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독일, 탄자니아 후원음악회에 참석하다

 

드레스덴 재림교회 본당이 음악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백발의 노신사로부터 엄마 손을 잡은 아이 그리고 독일에 거주하는 몇몇의 한인 분들에 이르기까지 100여명에 가까운 청중들이 음악회를 찾아주셨는데요.  이번 공연은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신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이유라 선생님과 미국 시카고의 테너 이경재 선생님의 협연으로 이루어진 탄자니아 자급사역자기술훈련센터 건축을 위한 후원음악회였습니다.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과 같이 잘 알려진 성곡 세 곡과 이태리 가곡을 포함한 아리아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격조 높은 음악회였는데요. 아마도 개인적으로 중학교 때 음악수업의 일환으로 세종문화회관을 찾아 감상했던 어느 클래식 연주 이후로는 처음 들어본 수준 높은 공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별히 헝가리 작곡가 레하르(Franz Lehar)유쾌한 미망인(The merry widow)’의 대표곡 입술은 침묵하고(Lippen Schweigen)’ 이중창은 유라 선생님의 바이올린 연주와 짓궂은 표정, 그리고 이경재 선생님의 연기가 빛나는 최고의 곡이었습니다. 음악회 중간에는 탄자니아 냐무스타초등학교(바라바이크 부족 지역 학교)에 대한 보고도 함께 있었는데요. 이 학교는 여러 후원자분들의 도움과 함께 3년 전, 첫 번째 독일 드레스덴 후원음악회에서 걷힌 자금이 발판이 되어 지어진 학교입니다. 그때도 이번 음악회처럼 한스욕 호프(Hansjoerg Hoff, 유라 선생님의 남편) 선생님 내외의 헌신으로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탄자니아 사역에 힘을 보태 주셨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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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시작 전, 드레스덴 재림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음악회 전반적인 준비 뿐만 아니라, 진행, 탄자니아 보고와 영상 통역, 이날 피자 주문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도와주셨던 호프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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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너 이경재 선생님, 소프라노 이유라 선생님, 피아니스트 그레이스 안(Grace Ahn) 선생님,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모든 공연이 마치자 관객들은 서슴없이 일어나 기립박수로 두 가수의 공연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등 대중적인 세 곡의 앙코르 곡이 이어지는 동안 저와 남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유럽에서 오로지 탄자니아 영혼들을 위하여 진실된 울림을 주고 있는 두 분의 모습에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가들이 펼친 놀라운 공연과 아프리카에서 펼쳐지는 역동적인 소식에 정말이지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호프(Hoff) 선생님 병원의 동료 의사가 전해준 호평처럼 2018 12 8, 그 음악회는 참석한 모든 이에게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탄자니아 영상이 흘러나오자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던 뒷좌석의 한 청중, 손을 꼭 잡고 여러 번 감싸 안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네려 애쓰던 한 모녀(고등학교 때 독어를 더 열심히 배워둘 걸 그랬습니다……). 마지막으로 은하와 은총이의 바구니 안에 귀한 센터 후원금을 넣어 주셨던 많은 분들에 이르기까지 낯선 타향에서 조용한 다독임과 격려가 물밀처럼 밀려오던 저녁이었습니다.

 

모짜르트의 나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탄자니아를 떠난 지 열흘이 지나자 남편의 증상이 거짓말처럼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물집이 잡혔던 손가락 마디마디는 살갗이 전부 벗겨지고, 새살이 돋느라 마치 신생아의 손처럼 새빨갛게 보였습니다. 발바닥 역시, 군데 군데 헌 살이 벗겨져 대륙이 갈라져 나가듯 너덜거릴 지경이었지만 새로 드러난 살들은 연한 두부처럼 말랑거렸어요. 그래도 이제는 열도 내리고, 유럽에서의 남은 일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만해도 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왼쪽 새끼발톱이 빠지는 불상사가 생기기는 했지만요(심한 수족구일 경우, 손발톱이 빠지기도 한답니다).

 

독일음악회가 마친 후, 나머지 두 안식일은 오스트리아 비엔나교회와 스페인의 아이토나교회를 방문하여 선교소식을 함께 나누었는데요. 비엔나교회는 함민호 담임 목사님 가정을 비롯하여 인근의 동유럽을 넘나드는 몇몇의 사업가 분들과 주재원가정, 그리고 15명 가량의 유학생들과 함께 3년 전, 독일에서 첫 탄자니아 후원음악회를 해주셨던 바리톤 김광일 교수님 가정이 주축을 이룬 한인재림교회입니다. 작은 공동체지만 얼마나 아늑하고, 따뜻하던지 마치 모국에 있는 교회를 방문한 듯 했습니다. 비엔나 교회의 여러 성도님들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꿈을 가지고 비엔나로 온 모든 유학생들의 삶이 그곳에서 환히 열리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새벽마다 비엔나를 너머 전 유럽의 한인유학생들을 위한 사역을 놓고 통성기도를 하시던 함 목사님. 도착한 첫 날, 흡입 수준으로 들이켰던 사모님의 잔치국수. 떠나던 날 아침, 곱게 싸주셨던 삼각김밥. 두 분의 따뜻한 환대가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요. 주말부흥회만 마치고 떠나는 저희 선교사 가정이었지만 간절한 기도와 함께 공항에서 건네주신 비엔나 한인재림교회의 격려에 보답하기 어려운 큰 사랑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00005수족구와 유럽.jpg- 비엔나 한인재림교회 교우님들과 안식일 예배를 마치고... 


특별히 얼마 전, 비엔나에서 건축을 전공하는 정모 청년으로부터 카톡 메시지 한 통을 받게 되었는데요. 여기서 잠깐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안녕하신가요, 목사님. 다름이 아니오라 최근 신기한 일을 겪어 소식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여름부터 잔고장이 많던 저희 집 세탁기가 누수가 심해져 새 세탁기를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목사님께서 비엔나에 오시게 되었구요. 부끄럽지만 분명 저는 당시 그 자금 중 일부를 드리는데 조금의 망설임이 있었습니다하지만 최근, 전부터 구매하려 했던 PC 모니터와 세탁기를 감사하게도 본래 예산보다 300유로나 저렴하게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흔들렸던 마음에 확신을 주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남을 위해 사는데 있어 결과에 상관없이 더욱 확신을 가지고 살겠습니다작지만 아이들 축구공 값이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에고. 순수함이 묻어나는 이 메시지를 읽으며 외지에 나간 남동생을 보듯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탁기가 필요한 줄 알았다면 지갑을 털어서라도 보태주고 왔을텐데…… 설날, 치마저고리 속 쌈짓돈을 고이 쥐어 주시고는 어이구, 이쁜 내 새끼하시며 한없이 얼굴을 쓰다듬으시던 울 할머니처럼 따뜻한 옛 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비엔나에서의 짧은 일정이었습니다. 

 

사랑, 그 자체 스페인 아이토나 교회에서

 

카탈루냐(Catalunya, 바르셀로나를 주도로 삼는 스페인 북부의 자치 지방) 본토인들과 페루, 콜롬보, 아르헨티나 등 남미 출신의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아이토나(Aitona) 재림교회. 이곳은 지난 9년 전,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시집간 제 동생 정연이의 교회이기도 합니다. 안개가 자욱했던 지난 12월 마지막 안식일, 중세 시대를 연상시키는 중후한 직가 거리의 오래되어 보이는 대성당을 지나자 좁다란 골목 입구에 아이토나 재림교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올라, 펠리스 사바도!”(Hola, feliz Sabado! 행복한 안식일입니다!) 반갑게 웃으며 귀가 번쩍 울리도록 양 볼에 뽀뽀를 쪽쪽 해주시는 성도들로 가득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종종 마사이 할머니들의 키스 세례를 받아본 터라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던 건 왜일까요.

 

대예배 시간, 아빠의 설교 전, 은하와 은총이가 문도 이 아빠르떼(Mundo y Aparte)’라는 곡으로 찬양을 드렸습니다. 교회에 찬양대가 따로 없어 특창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였지요. 한 달 전, 집에서 유투브로 찬양곡을 검색하다 스와힐리어 노래인 바바 예투(Baba yetu)’가 코러스로 나오는 스페인 곡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은하와 은총이는 뜻도 모르는 스페인어 가사를 연습장 가득 적어놓고, 학교를 오가는 길에 따라 부르며 수없이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그저 멜로디를 따라 흥얼흥얼 흐르는 부정확한 스페인어 가사에 귀가 거슬릴 법도 하셨겠지만 찬양을 듣는 아이토나 성도님들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설교 역시, 스페인어로 통역되느라 보통 시간보다 30분은 더 지체가 되었지만, 모두 끝까지 초 집중하여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간증집인 <하쿠나 마타타 탄자니아 쌍둥이네 이야기>(영문판) 역시 없어서 못 드릴만큼 아이토나 교우들의 선교지에 대한 관심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00006수족구와 유럽.jpg 00007수족구와 유럽.jpg 아이토나 교회.jpg

- 사랑 많은 아이토나 교우들과 함께


오후 집회를 통해 다시 한번 탄자니아 소식을 나눈 저희 가족은 눈시울이 붉어진 많은 성도들, 한 분 한 분과 포옹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선교정신을 일깨워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선교사님은 하늘에 가서 만나게 될 영혼들이 무척 많을 것입니다. 언어의 장벽이 없는 그곳에서 다시 만나길 소망합니다. 정연이 가족을 무척 사랑하지만 이제 당신의 가족 역시 우리의 가족이며, 당신들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 그 자체일까.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눈물이 솟아올라 멈추질 않을 만큼 아이토나는 진실한 마음과 사랑을 가진 하늘 백성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안처럼 푸근하고, 어머니의 품처럼 애틋한 그런 사랑의 자녀들 말이지요.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먼 타국에 살고 있어 늘 안쓰럽고 애잔했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어린 딸을 키우며 일 나간 남편을 하루 종일 눈 빠지게 기다리는 동생의 모습을 그려볼 때마다 멀리 있음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낯선 이방인을 가족으로 받아주는 성도들을 보니 이제는 마음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생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알레한드라라는 여 집사님은 저를 꼬옥 안아주며 정연이는 내가 잘 돌봐줄께요. 걱정 마시고, 조심히 가세요.”란 말로 제 눈물샘을 또 한번 터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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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 가족과 함께


다시 집으로

 

낯익고도 낯선 나의 집, 아프리카로 향하며 멀어지는 유럽의 풍경을 마음 속에 꾹꾹 담아 두었습니다. 중세와 현대가 묘하게 공존하는 그 아름다운 도시들 속에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이 있으니까요. 다시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한 저희 가족은 낡아서 창문조차 안 열리는 현지 택시를 잡아타고 아루샤로 향했습니다. “, 덥다.” 오전 9시인데도 태양이 작열하는 날씨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달리는 차 안에서 은총이가 한 마디 합니다. “불편 그만! 유럽에서는 춥다고 아프리카 가고 싶다고 그러더니 이제 아프리카 오니까 다시 유럽이 좋다고 하는 건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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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운 나라 우리집에 왔습니다


남편의 수족구도 이제 뭉툭한 흔적만 남겨놓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수족구와 유럽, 참 안 어울리는 두 단어이지만 지난 한 달 간, 하나님은 남편에게 헌 살 대신 새 살을 주셨고, 저에게도 헌 마음 대신 새 마음을 채워 주셨습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말이지요. 2019, 한 해도 유럽 곳곳에서 받은 무한한 사랑을 제 곁에 있는 바라바이크와 마사이와 하자베, 그리고 이름 모를 영혼들에게 마구마구 퍼주는 선교사로 살고 싶습니다. 생명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값진 사랑의 샘물이 우리의 삶 속에서 조건 없이 흘러 넘치길 기도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