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 시카모(Baba, Shikamo, 안녕하세요). 나베바(Nabeba, 제가 들어드릴께요).”

그를 처음 만난 건 2년 반 전, 시장 입구에서였습니다. 야채나 과일을 봉지에 담아주는 한국 시장과는 달리 이곳에는 봉지를 파는 사람들이 따로 있지요.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10~18살 남자 아이들이 거리로 나와 생계를 위해 검은 비닐봉지를 팝니다. 장당 100실링(한국돈 60원)하는 비닐봉지를 팔고,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장 본 물건들을 들어주면 대게 500실링에서 1,000실링을 더 얹어 줍니다. 그렇게 한 달을 꼬박 벌어 손에 쥐는 60,000실링~80,000실링(4만원~5만원)으로 식구들을 챙기고 못다한 학업을 이어갑니다.

봉지 파는 소년 중 하나였던 이싸(Issa). 일찍이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시고 올길레이(Olgiilei)라고 하는 산 중턱에서 할머니와 여동생 해피(Happy)와 함께 사는 18살 된 소년입니다. 올해 20살 청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시장에서 봉지를 팔고 있지요.

소년들 중에는 퀭한 눈,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살짝 술냄새를 풍기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1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키도 작고 깡마른 아이들이 “China! China!(중국인! 중국인!)”하며 어깨를 툭툭 치는 모습이 처음에는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그런데 이싸는 달랐습니다. 만날 때마다 “안녕히 지내셨어요(시카모!)”인사하며 공손히 저희 뒤를 따라왔지요. 그런 이싸에게 500실링이나 1,000실링을 늘 더 얹어 주곤 했습니다.

올해 초, 이싸에게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습니다. “좋은 책이 있는데 한번 공부해 볼래?” 희망의 소리 통신과목을 건네던 날, 시장 근처 식당에서 만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바로 아버지도 세상을 뜬 후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동생 가르치기에도 빠듯한 살림이지만 오토바이를 한 대 사려 조금씩 돈도 모으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좀 더 자주 만나 밥도 먹고, 그가 살고 있는 집도 방문했습니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었지요. 교회에 특별 부흥회가 있으면 초대해서 예배도 함께 드렸습니다.

매주 안식일에는 저희들이 방문하는 다양한 사역지들을 함께 다니기도 했습니다. 대게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2~3시간 거리를 여행하는 일도 극히 드문 탄자니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싸는 그 때마다 굉장히 행복해 했습니다. 12살된 그의 여동생도 저희와 가끔 동행을 했는데 조금만 멀리 나가도 멀미 때문에 구토를 하는 바람에 나중엔 이싸만 데리고 다녔습니다.

지난 4월, 부활절 기간(이 기간엔 대게 2주간의 쉬는 날이 계속됨)에는 가까운 아루샤 국립공원(Arusha National Park)에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버팔로와 기린, 코끼리를 보며 연신 “와, 와!”하던 이싸와 해피. 해피는 그날도 여지 없이 마신 딸기 우유와 감자칩을 차 안에 죄다 토하고 말았습니다. 토사냄새가 진동하는 차 안이었지만 라이온 킹에 나오는 주술사 원숭이(흔하디 흔한 바분-Baboon원숭이와는 달리 아루샤 국립공원에서만 서식함)를 보겠다며 끝까지 국립공원을 다 돌았지요. 아이들이 “바바, 마마(아빠, 엄마), 아산테(감사합니다)” 하며 하루 종일 행복해 하는 모습에 딸기향 풍기는 구토 냄새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싸를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세케이(Sekei) 재림교회에 연결해 주고 그곳 장로님들께도 그를 소개했습니다. 매주 저희들과 함께 다닐 수는 없기 때문에 인근 교회에서 그를 붙잡아 주고, 혹시 침례를 받게 되면 교적을 올릴 수 있는 소속 교회가 있기를 바랬기 때문이지요. 책을 좋아하는 이싸에게 스와힐리어로 번역된 예언의 신도 몇 권 건넸는데 특별히 ‘각 시대의 대쟁투’를 읽고서는 ‘정말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진짜다.’하며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이싸와 침례 받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7월 말, 키오가라는 지역에서 큰 전도회를 하는데 그 전도회에 참석하고 침례를 받는게 어떻겠느냐 물어보았습니다. 이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8월 2일, 마지막 침례식이 있던 날. 이싸는 전도회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침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당혹스럽고 실망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교제하고 결혼까지 약속한 남자가 결혼 당일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만 같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도 여쭈어 보았습니다. “하나님, 왜죠? 뭐가 문제일까요? 마음이 많이 열렸다고 생각했는데... 성경통신과목과 안식일 출석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겠다고 침례를 받겠다고 말한 것도 이싸 자신이었는데... 왜죠...”

갑자기 결혼이 취소되고, 당황하는 하객을 돌려보낸 후, 얼마 동안은 이싸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시장에서 마주쳐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왜지... 왜일까... 물어볼 수 없는 질문만 머리 속에서 왱왱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이싸와 같은 마사이(Masai) 부족 출신의 교회 장로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싸가 결혼을 영영 취소한 건 아님을...

장로님은 대화 중 우연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바야흐로 때는 1982년, 아루샤에 단 한 명의 마사이 재림교인도 없던 시절, 지금의 탄자니아 연합회장이신 레쿤다요 목사님으로부터 재림기별을 받아들인 첫 번 째 마사이가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 때는 아루샤 전체에 오직 부르카(Burka)라는 지역에만 재림교회가 단 한 군데 있었을 뿐일 때라 음가람토니(Mgaramtoni)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부르카까지 그 먼 길을 안식일이면 늘 걸어서 교회에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침례를 받은 때는 1989년, 그로부터 7년 후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10년 동안 속으로는 이 진리가 긴가민가, 이 말씀이 긴가민가 고민과 갈등의 긴 시간을 보내고 1999년이 되어서야 온전한 그리스도인, 온전한 재림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덧붙이시더군요. “마사이는 기별을 받아들이는데 느립니다. 뼈 속 깊은 곳까지 마사이의 전통 신앙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진리가 들어오려면 그 뼈 속에 있는 피를 쏟아 버려야 합니다. 뼈가 부러져 나오고, 피가 흘러내리면 그 안에 새로운 것들이 채워지기까지 누구에게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마사이의 뼈 안에 깊숙이 채워지면 그는 결코 결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사이 중에는 잃은 양이 없습니다.”

저, 이싸를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 잘 데리고 갈 수 있겠지요?

결혼식 날짜를 공연히 일찍 잡고 실망했던 선교사 초년병은 아직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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