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작년만 해도 광야 한가운데 덩그라니 텐트를 치고 잠을 잤었는데 그래서 밤새 불어닥치는 바람과 빗소리를 고스란히 느끼곤 했었는데 하이에나가 텐트 주변이라도 어슬렁 거리는 밤이면 왠지 모를 섬뜩함에 이리저리 뒤척이곤 했었는데 이젠 든든한 교회 안에 텐트를 치고 네 식구가 함께 잠을 잡니다. 텐트 양쪽엔 엄마 아빠가 눕고 가운데에 은하 은총이는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잠을 잡니다. 4일간 못감은 네 식구 머리에선 냄새가 말이 아니고, 손과 발 밖에 못 씻은 탓에 며칠째 땀에 절었던 어깨와 등, 허벅지는 끈적끈적 달라붙지만 머리라도 뉘일 수 있는 텐트가 있어 감사하기만 하네요. 시계도 알람도 없는 광야의 아침은 교회 안이 어슴푸리 밝아오는 새벽 5시 30분에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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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30분

 

둥근해가 떠오르기도 전, 교회를 찾은 바라바이크 아이들, 그리고 에쉬케쉬 가족들(두 사역자 가정)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2년 전, 이곳 광야에 첫 발을 디딘 후 맞았던 첫 날 아침.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광활한 땅을 바라보며 벅찬 마음으로 노래했던  '큰 일들을 이루신 하나님께'(Mungu Atukuje)가 저희 에쉬케쉬 광야의 주제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매일같이 큰 일들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광야에서의 아침은 이 찬미를 힘차게 부르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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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여긴 가시나무 밖엔 자라질 않아' 에쉬케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낮에는 태양이 작열하고, 밤엔 이가 부딪힐 정도로 바람에 세찬 이곳에서 가시나무라도 잘 자란다는 건 감사한 일일 테지요. 가시나무는 사람들의 집과 집을 구분하는 울타리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하지만 퍽퍽한 이 광야에 뾰족뾰족 찌를 듯한 가시나무만 자란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안그래도 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에쉬케쉬가  너무 삭막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린 교회 앞엔 꽃나무를 심고 교회 뒤뜰엔 파파야 세 그루와 망고 나무 한 그루를 심기로 했습니다. 파파야는 5개월만 지나면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하네요. 건조한 땅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조금씩 물을 주면 제법 잘 자란다고 하니 참 고마운 마음마저 듭니다. 은하와 은총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로 심은 묘목에 물을 주었습니다. 이제 곧 생명이 자라 그 열매를 나누어 먹을 생각을 하니 뭔지 모를 희망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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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곡식 가루를 풀어 죽을 만들고 사온 빵을 적셔 먹은 후,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칩니다. 사역자 집에서 밥을 먹는데 벽에 왠 종이 박스들이 실에 걸려 매달려 있습니다. 꼬꼬꼬꼬. 알을 품은 닭이 방해를 받지 않고 출산(?)을 할 수 있도록 벽에 박스를 달아 암탉을 한 마리씩 넣어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암탉들을 새벽녂에 풀어 놓는데 이 녀셕들, 꼭 우리가 밥을 먹고 있을 때 박스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야단입니다. 발 밑으로 암탉 한 놈이 후다닥 거리며 오더니 의자를 타고 박스 안으로 휙 올라가 앉습니다. 꽥꽥 소리에 날리는 닭털까지! 참 희한한 광경입니다. 설겆이는 제 몫인데요. 이제 웅덩이에서 퍼올린 물로 대야 두 개를 가득 채운 후, 설겆이를 시작합니다. 쭈그리고 앉아 다 먹은 접시와 컵들을 뭔가 석연치 않은 거무스름한 물에 담가 나름 가루비누에 풀어 씻고, 옆에 대야 물에 휙휙 헹구어 또 다른 대야에 차곡차곡 세워 놓으면 설겆이가 다 된 것입니다. 이곳 사람들이 쓰는 웅덩이 물로 설겆이를 하고 밥을 해도 위장에 탈이 나지 않는 걸 보면 하나님께서 내장기관에 한 마디 하신 것 같습니다. '얘들아. 너무 놀랄 것 없다. 위액, 너는 해가 될 만한 것 다 녹여라. 간, 너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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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

 

남편은 사역자들의 집에 태양열을 이용해 전구를 하나씩 달았습니다. 개척 2년 만에 처음으로 전기를 들여놓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솔라렌턴(태양열 손전등)만으로 밤을 버텨왔는데 사역자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면서 전기가 꼭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DVD 플레이어를 통해 목사님들의 설교나 합창단의 노래들을 바라바이크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되면서 이 기기를 꼭 충전해야 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불이 들어오는 방안에서 행복해 하는 사역자 가족들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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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바라바이크 아이들이 교회로 옵니다. 오늘 날짜도 모르고,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에쉬케쉬 공동체에서 저희 교회에게 학교를 열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아직은 학교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안되기에 일단은 작은 교회학교를 열어 스와힐리어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날로 아이들에게 풍선을 불어 각자의 이름을 써 주고, A,B,C를 가르치기에 앞서 선을 긋는 연습부터 시켰습니다. 연필을 잡는 연습조차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이지만 언젠가 글씨를 쓰고 성경을 읽는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친 후, 잠시 쉬고 있는데 아밀리아제 아줌마 아이들 두 명이 저만치서 걸어오네요. 손에 달걀 한 개씩을 가지고 먼지가 날리는 뜨거운 광야길을 걸어왔을 요 조그만 아이들이 제 손에 달걀 두 개를 쥐어 줍니다. 제 귀에 '바디스조드(Badisjode, 고마워요)' 속삭이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워 눈물이 핑 돕니다. 이 맛에 광야를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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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작년 에쉬케쉬에 들어 올때 꽤 비싼 돈을 주고 장막을 만들었습니다. 그 장막 안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지요. 그런데 지난 7월, 한 부족원이 장막 천을 갈갈이 찢어 버린 후 텐트 구조물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걸 어떻게 다시 활용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바라바이크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그늘막을 만들면 좋겠다고 남편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마침, 아루샤 집 뒤 뜰에 아프리카 생활에 적적해 하는 은하와 은총이를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던 미끄럼틀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왕이면 바라바이크 아이들과 함께 타면 좋겠다 싶어 3주 동안 휘어 지고 칠도 다 벗겨진 장막 틀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용접할 부분들은 다시 용접을 하고, 철 봉 몇 개를 더 구입해 맞추고, 에쉬케쉬에 가서 바로 조립할 수 있도록 드릴로 구멍을 일일이 뚫어 조립 부위마다 숫자를 새겼습니다. 칠이 벗겨진 틀은 다시 깔끔하게 녹색으로 칠했습니다. 그런 후 가져온 텐트 뼈대를 조립하고 끼우고 세웠습니다. 얼마나 무거운지 여자인 저까지 합세하여 구조물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런 후, 아이들이 놀때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도록 지붕에 철판도 깔았습니다. 미끄럼틀을 세우기 위한 작업은 다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늘막은 완성이 되었습니다. 저녁 무렵, 미끄럼틀을 붙들고 아이들을 잠시 태웠더니 참 좋아하네요. 교회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미끄럼틀로 달려나와 신나게 놀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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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30분

 

잠시 쉬러 들어온 남편의 가슴 위에 가브리엘 사역자의 5개월 된 아들, 아마니(Amani)를 올려놓았습니다. 은하 은총이가 갓난 아기였을 때 한 아이는 제가 안고, 한 아이는 남편의 가슴에 올려 놓곤 했었지요. 신기하게도 아마니는 낯선 아저씨의 가슴 위에서 조용히 잠이 들었습니다. 마치 아마니가 저희 아이가 되고, 저희는 그의 부모가 된 듯 했습니다. 바라바이크 아이들에게 그런 부모, 그런 이웃, 그런 친구가 되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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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오늘 저녁 메뉴는 닭도리탕입니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광야에서 돌이 섞인 우갈리(옥수수 가루 반죽)와 차이(차, tea) 정도만 먹으며 살고 있는 가브리엘과 조셉, 두 사역자 가정을 위해 오늘 특별히 닭 두 마리를 샀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는 마트 냉장고 안에 조용히 누워있는 흰 닭만 봤던 터라, 닭이 죽는 처절한 광경은 이날 처음 봤는데요. 칼로 목을 자른 후, 끓여 놓은 물에 닭을 담궈 털을 다 뽑고, 내장이며 쓸개들을 분리해 내는 모습이며, 눈알과 발톱만 빼고 모조리 냄비에 넣어 끓이는 모습을 보니 붉은 닭벼슬과 빠진 눈자위, 그리고 동강난 몸뚱아리를 드러낸 닭이 정말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사역자 가족들이 모처럼 맛나게 저녁을 먹는 모습을 보며 엄마 앞에서 밥을 먹는 내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많이 드세요. 그리고 힘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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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몇 가정을 방문하러 나섰습니다. 갑돌리나 아줌마네, 셀리나 아줌마네, 네마네, 그리고 에쉬케쉬 부족장님의 집까지. 일부러 아루샤에서 사가지고 온 마칸데(마른 옥수수)를 1kg씩 봉지에 담아 길을 나섰습니다. 지난번 물탱크 설치할 때 왜 안왔느냐고 보고 싶었노라고 어깨를 다독이는 아주머니들. 이제 이 광야에 나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광야는 더 이상 척박하고 아무것도 없는 땅이 아닙니다. 나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들은 내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지내나 알고 싶고, 아루샤에 있으면 광야가 그리운 건, 그곳에 친구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해 마음을 열어준 갑돌리나, 셀리나, 그리고 네마. 수줍은 듯 계란 8개를 봉지에 넣어 교회까지 찾아온 크리스티나. 나의 모든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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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

 

이제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가 몸을 뉘입니다. 오늘도 고단했던 하루지만 행복했네요. 하나님이 계셔서 그리고 바라바이크 사람들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한국의 부촌, 청담동도 부럽지 않은 이유. 광야에서 느끼는 이 풍요로운 감사와 행복은  하나님께서  선교지에 부어주시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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