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629일 저녁 9시 반, 평소 같으면 자리를 깔고 누울 시간입니다. 아이들을 씻기고, 마지막 기도를 드린 후 남편이 이민용 가방이며 박스를 차에 싣는 동안 저는 부모님의 안방에 이부자리를 깔았습니다. ‘몽실 언니를 읽다가 혹은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재미난 이야기를 듣다가 때로는 밖에서 일어난 일들에 깔깔 거리며 웃다가 스르르 잠들던 곳, 아이들이 한동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자던 방입니다. 이제는 손녀들을 떠나보내고 예전처럼 두 분만 주무실 텅 빈 방. 때로 아이들이 덮었던 이불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펑펑 쏟으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제 마음마저 무거워졌습니다. ‘엄마, 아빠 계신 이곳이 내 집인데 집을 놔두고 이 밤에 어딜 가나.’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후 집을 나섰습니다.

 

보딩 시간이 1140분으로 바뀌었다며 수화물을 싣는 마지막 고객이십니다. 서둘러 게이트로 이동하세요.’라는 말에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출국장을 빠져나왔는데 비행기는 자정을 넘어 새벽 1시가 되도록 점검중이랍니다. 아이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딱딱한 공항의자는 또 어찌나 차갑던지. 언제 출발할지 모를 비행기를 기다리느니 애들을 좀 눕혀야겠다 싶어 작은 담요를 까는데 엄마, 우리 꼭 가야돼요? 한국에서 살면 안 돼요?’ 이 말을 뱉고는 엉엉 울어버립니다. 결국 재우지도 못한 채 1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탑승을 마치고 인천의 어둑어둑한 활주로를 벗어나는 비행기 안에 몸을 실었습니다.

 

아부다비(Abu Dhabi)에서 나이로비(Nairobi)행으로 갈아타니 검은 대륙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능숙한 솜씨로 리모콘을 조작하며 영화 프로즌(FROZEN)’을 감상하다 재미없어 보이는 게임에 한참이나 넋을 잃었던 쌍둥이는 기내식 카트가 등장하자 헤드폰을 내려놓고 승무원 언니 맞을 준비를 갖춥니다. 밤새 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로 이동하느라 푸석푸석한 얼굴과 엉클어진 머리가 가관인데도 어쩐 일인지 식사 시간만 되면 번쩍 눈을 뜨는 우리 네 식구 모습에 웃음이 피식 나옵니다.

 

기체가 요란스럽게 한바탕 진동을 하더니 잿빛 구름 아래로 갸우뚱 거리며 하강을 시작합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땅 위로 듬성듬성 집들이 눈앞에 들어오자 웅성웅성 벌써부터 내릴 채비들을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보, 다 왔네.’ 우리 부부는 눈으로 서로를 읽고는 손을 맞잡았습니다. 무겁고 떨리는 가슴으로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는 중,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착륙 직전, 멀쩡하던 은총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마, 나 내리기 싫어.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면 안 돼?’ 남편과 눈이 마주칠 때도 꾹 참았던 눈물이 이제야 흘러내렸습니다. 우는 아이와 함께 그냥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은총아, 맞아. 엄마도 슬퍼.’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가 우리를 맞으러 지금 나이로비 공항에 나와 계실 거야. 은하 은총이 탄자니아까지 잘 데려다 주시려고. 그런데 이렇게 울면서 안가겠다고 하면 천사가 얼마나 서운하실까?’ ‘천사가 우리를 기다려?’ ‘그럼. 비자 받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실걸? 우리 이곳에서 씩씩하게 잘 지내다 한국에 가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서히 울음을 그칩니다.

 

공항 밖을 나오자마자 마치 대화 속의 그 천사가 대기하고 있다 예약해 준 것 같은 택시를 잡아탔습니다(케냐 공항에서 말싸움 없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택시를 잡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후덕해 보이는 운전기사 아저씨와 함께 자일리톨 껌을 나누어 씹으며 나이로비를 거쳐 케냐-탄자니아간 국경인 나망가(Namanga)까지 가는 길. 듬성듬성 거리에 보이는 소 떼, 시끌벅적 쓰레기가 날리는 시장 풍경까지. 이상하게도 이 모든 광경이 너무나 낯익습니다. 잘근잘근 껌을 씹으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소를 구경하던 은하가 한마디 던집니다. ‘우리나라 다시 왔네.’ 잘못 들은 것 같아 재차 물어봤습니다. ‘은하야, 아프리카가 우리나라야?’ ‘, 우리나라는 두개야. 하나는 한국, 하나는 아프리카떠나 있어 늘 그리운 한국,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나라, 탄자니아. 아이들은 엄마, 저것 봐.’하며 제 2의 모국을 이곳저곳 살피더니 , 배고프다. 우갈리(Ugali, 옥수수 가루로 만든 떡반죽으로 탄자니아의 주식) 먹고 싶다.’하며 그제야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7월 한 달, 그동안의 부재(不在)속에도 사역지마다 일을 이루어 가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음불룽구(Mbulungu) 마사이 지역. 커다란 나무 밑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을 위해서라도 교회 건축이 꼭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장장 반년 동안 자그마한 부지를 요청하는 교회에 묵묵부답이었던 마을 사람들이 마침 우물을 파기 위하여 서베이(Survey) 장소를 둘러보던 713, 드디어 교회 부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곧 우물 시추를 위해 탄자니아를 방문할 후원자들과 함께 건축을 위한 첫 삽을 뜰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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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불룽구 교회부지에서, 아직 경계석이 없어 사방에 식물을 심어 놓았습니다

 

영어교실을 연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교인수가 고작 15명을 넘지 못한 렝기자베(Lengijave) 교회. 유난히도 바람이 세차게 불던 수요일 오후, 영어교실도 둘러볼 겸 교회를 찾았습니다. 까만 눈동자가 빛나는 똘똘한 마사이 아이들 댓 명이 앉아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엘리샤 사역자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목청을 높였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아루샤(Arusha) 외곽의 작고 열악한 교회를 변함없이 섬기고 있는 사역자의 모습, 부름 받은 곳에서 조용히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잠잠히 대변해 주는 것 같아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예배를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레마라(Lemara) 빅토리영어교실(Victory English Bible Class)의 벤자민(Benjamin) 사역자가 기쁜 소식을 안고 저희 집을 찾아왔습니다. 지난 517일부터 66일까지 있었던 레마라교회 전도회를 통해 영어교실 구도자 중 4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영어교실 학생인 셀리나(Slina)의 엄마와 이소연 집사님이 학비 등을 지원해 주셨던 길버트(Gilbert) 가정의 할머니, 길버트의 엄마, 그리고 사촌 노엘리(Noleli)까지 4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고 감사하던지요. 특별히 길버트 가족은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길버트의 할머니와 우울증에 걸린 과부가 된 두 딸, 즉 길버트의 엄마, 노엘리의 엄마가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가정이었기에 오랫동안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주고 기도해 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가정을 구원하시고, 교회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정말 제 가족의 일처럼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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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버트 가족의 모습, 이중에 보라색 티셔츠 입은 가운데 여인(길버트 엄마)과 가운데 네이비(Navy)색 옷을 입은 소년 노엘리가 이번 전도회를 통해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 소식은 레마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노귀환 목사님께서 후원하시는 마쿠유니(Makuyuni) 교회에서도 5월에 치른 전도회를 통해 4명이 침례를 받았고, 김순만 목사님의 후원지인 로시밍고리(Losimingori)교회에서도 6월 말, 9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소식이 이어졌습니다.

 

뿌려놓은 씨앗들이 자라 아름답게 열매 맺은 모습들을 선물로 안겨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기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많은 후원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금요일 예배, 안식일학교 순서 등 다양한 시간을 배려해 주셔서 선교지 소식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방문교회의 목사님들과 성도님들과의 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쿠나 마타타 쌍둥이네 탄자니아 이야기들을 사랑해 주시고 어깨를 두드려 주시며 사역을 이어가도록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명하신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선교사 가족이 되도록 변함없는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안식일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