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1- 선교사는...

 

7, 한 달 내내 오른쪽 머리가 빠개지듯이 아프더니 침을 삼키면 귀도 아프고, 속은 속대로 니글거리는 이상한 증세가 이어졌습니다. 미련하게 버티다 8월 초, 드디어 병원에 가서 피도 뽑고 소변 검사도 의뢰했습니다. 결과는 인수공통전염병인 브루셀라(Brucello sis)균 감염. 고기는 고사하고 우유도 못 마시는 제가 난생 처음 듣는 브루셀라에 감염되었다니요? 아침저녁으로 항생제를 챙겨 먹은 지 꼬박 일주일, 키쿰비(Kikumbi) 사역지 방문 하루를 앞두고 마음은 계속해서 갈지자(之字) 걸음을 걸었습니다. 집인 아루샤(Arusha)에서 중간 정착지인 루쇼토(Lushoto)까지 꼬박 7시간, 다시 루쇼토에서 사역지인 키쿰비까지 가려면 다라(Dalaa)라고 하는 높은 산을 3시간 가까이 내려가야 합니다. 연약해진 육신은 선교지까지 언제 가나. 꼭 가야되나. 루쇼토는 엄청 춥다던데. 지금도 아픈데 다녀 온 후, 애들까지 된통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끊임없이 칭얼거립니다.

 

D-day 1- 하나님은...

 

갈피를 못 잡는 아내와는 달리 남편은 이날 오후, 난데없이 차량 앞바퀴 두 개를 하드타이어’(광폭타이어)로 교체합니다. 사실 루쇼토를 지나 키쿰비로 가는 여정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데도 남편은 마치 가본 사람 마냥 준비가 철저합니다. 바꾼 타이어 밑을 살피던 중 기름떼가 묻은 흔적을 발견하자 지체 없이 정비소로 달려가더니 2시간에 걸쳐 앞 축에 찢어진 고무커버를 교체하고 이곳저곳을 손 본 후 돌아왔습니다. 과연, 이틀 후, 구글지도(Google Map) 상에도 시커멓게 나오는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인 다라 산맥을 넘는데 출발 하루 전, 타이어와 찢어진 고무커버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절로 가녀린 신음이 흘러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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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색 별표 표시가 사역지 키쿰비이며 가운데 진한 녹색 부분이 우리가 넘은 다라(Dalaa) 산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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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쿰비 사역지에서 바라본 다라(Dalaa) 산 전경

 

Day 1- 선교사는...

 

출발 당일 새벽, ‘하나님, 선교지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만 오늘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고 순종할 힘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쳤는데 마침 그날 읽을 차례인 정로의 계단 제 10, ‘하나님을 아는 지식편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꽃이 은근하고 우아한 것처럼 깨끗하고 단순한 품성을 기르길 원하신다’. 이어 그러한 품성으로 조물주의 뜻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호하시고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붙드신다’(86)는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서둘러 주먹밥을 싸고 침낭이며 입을 옷가지를 챙긴 후 아이들을 깨웠습니다. 키쿰비 사람들에게 줄 알벤다졸(구충제), 멀티비타민, 중고옷도 한가득 실었습니다.

 

Day 1- 하나님은...

 

한국의 강원도라 불리는 루쇼토는 정말이지 아름다웠습니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울창한 삼림, 계곡 사이사이로 흐르는 절경의 폭포들. 이곳은 탄자니아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로 이렌테(Irente)’라고 불리는 정상에 올라 사람과 호흡을 같이 하는 뜬구름을 손으로 잡아보고 그 사이에 살포시 얼굴을 내민 절벽을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주로 광야에 있는 사역지를 돌아다니는 저희로서는 모처럼 눈도 마음도 시원하게 뚫리는 청청한 휴식처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문제는 오후 늦게 도착하여 겨우 잡은 숙소에 흙탕물이 나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롯지(Lodge) 주인은 요새 비가 많이 내려 그러니 수도꼭지를 한참 틀어놓으라는 말뿐 별 대책이 없어보였습니다. 고지대에 위치한 루쇼토의 밤은 또 어찌나 춥던지요! 벌벌 떨면서 세겹 네겹 옷을 겹쳐 입고 샤워도 못한 채 침대에 들어가 누우니 사역지고 뭐고 다시 아루샤 집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떨어서 그런지 다시 오른쪽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왔습니다. 아침도 점심도 주먹밥으로 때웠고, 저녁마저도 벌레가 폭 빠진 야채수프에 짜디짠 카레로 대충 먹었는데 샤워도 못하다니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요즘 하루 13시간씩 전기가 나가는 아루샤 집에서도 샤워하기가 불편해 곤혹을 치르는 중인데 돈을 내고 잠을 자는 숙소에서까지 물이 나오지 않는다니! 어떻게 가는 곳마다 이런 것일까 착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장 키쿰비의 알파요(Alphayo) 사역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일 아침 루쇼토에서 만나자고 말이지요. 숨긴 것이 하나 있다면 내일 사역자를 만나는 즉시, 가져온 약이며 옷가지 다 실어서 보내드리고, 우린 이렌테 정상에나 올라가 절경을 구경하고 편안하게 안식일을 맞자는 속마음이었습니다. 전화를 걸고, 다음날 여행계획을 세운 것은 우리끼리 순식간에 벌인 일인 듯 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전화 한통을 통해 갈팡질팡하는 선교사의 마음을 차분하게 돌려 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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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바를 두개씩이나 껴입고 침대에 누운 은하와 은총이(사실 두 잠바 안에 두꺼운 스웨터와 내복까지 입었습니다)

 

Day 2- 선교사는...

 

다음날 아침 9, 사역자가 루쇼토 시내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다시 생각은 바뀌어 사역자를 그냥 가게 할 수는 없으니 함께 이렌테 정상을 구경하고 다음날 안식일 아침, 함께 키쿰비로 가는 것은 어떻겠냐는 의견에 서로 맞장구를 치고는 시내로 차를 몰았습니다. 멀리서 헤진 잠바를 입고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알파요 사역자. 그를 본 순간 이렌테 정상이니 절경을 운운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깨끗한 차림에 허연 얼굴을 한 우리 가족 모습도 함께 부끄러워졌습니다. 한참 포옹을 하고 손을 맞잡으며 그간의 안부를 묻는데 얼마 전, 말라리아를 앓았다는 사역자의 고단한 표정과 비쩍 마른 모습이 찬찬히 제 가슴에 미안함과 아픔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조용히 저를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 ‘여기 설탕과 웅가(Unga, 우갈리를 만들 수 있는 가루) 파는 데가 어딜까요?’ 우리는 터미털 뒤편에 있는 가게를 찾아 안식일에 마사이 교우들에게 나누어 줄 설탕 30kg와 웅가 50kg를 샀습니다. 그리고는 사역자와 함께 키쿰비로 출발했습니다.

 

Day 2- 하나님은...

 

다라(Dalaa)산맥은 생각보다 훨씬 크고 높았습니다. 바라바이크 부족의 에쉬케쉬로 가는 길, 강을 넘고 오르게 되는 마가라(Magara)는 다라에 비하면 작은 언덕에 불과했습니다. 차는 3시간에 걸쳐 구불구불한 산길을 용케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핸들과 타이어를 굳게 붙들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산 밑의 마사이들의 마을, 키쿰비. 14개월 만에 다시 방문하는 사역지엔 낯익은 몇 교우들이 나와 저희들을 반겨주었습니다. 교회를 둘러보고, 사역자 집안에 가져온 모든 물건들을 내려놓고 출발하려던 차, 한 교우가 저희 손에 자와디(Zawadi, 선물)’이라며 돌돌 말린 작은 봉지를 쥐어 주었습니다. 풀어보니 보랏빛이 나는 돌이었습니다. ‘엄마, 이제 우리 부자가 되는 거야?’ 처음 보는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하는 은하와 은총이를 보며 교우가 말했습니다. “우카리비쉐 케쇼 사나. 와투 웽기 와타쿠자 쿠이바다 나 웨웨(Ukaribishe kesho sana. Watu wengi watakuja kuibada na wewe, 내일 안식일에 꼭 오세요. 목사님네 오신다고 동네 사람들도 예배에 많이 참석할 거에요)” , 그래야지요. 텐트를 가지고 왔다면 키쿰비 사람들과 동네 한켠에서 함께 저녁을 보낸 후 맞고 싶은 예비 안식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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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선 사람이 알파요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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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물로 받은 광물

 

Day 3- 안식일, 하나님과 함께

 

안식일 아침,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마사이 찬양들이 줄기차게 이어졌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선창으로 곡조를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후창으로 따라하는 마사이들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어깨가 들썩여지고 신명이 납니다. 이 깊고 깊은 산자락 아래, 마치 시내산 아래 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큰 산 아래서 예수, 예수를 부르며 찬양하는 마사이들의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며 깊은 감동이 일었습니다. ‘, 하나님. 깨진 옹기 같은 저를 복된 예배 장소까지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선교사가 사랑의 빚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치자 키쿰비의 모교회인 마람바(Maramba)교회에서 오신 아론(Aron)장로님께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이런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예수님께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은 절대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차목사님 가족이 그 멀고 먼 한국에서 그리고 아루샤에서 루쇼토로 음랄로(Mlalo, 산 넘기 직전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리고 이 다라 산을 넘어 이곳 키쿰비까지 올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건들을 차에 가득 싣고 먼 길을 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피부색과 언어가 완전히 다른 한 가족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키쿰비까지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우리 모두를 저 하늘까지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순간 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저희 모두를 이끄셨건만 부질없이 뒤로 물러서려고만 했던 연약한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사랑의 줄로 한국의 선교사와 탄자니아 마사이 사람들을 붙들어 매신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필요한 건 선교 대상자인 키쿰비의 마사이들이 아니라 사실 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찬양드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불과 2년 전 개척을 시작한 이 교회의 모습을 통해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 그래서 그 목자가 부르시면 네 하고 따라갈 수 있는 조용한 신뢰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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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가장 충분히 안식함을 얻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열심히 활동하게 될 것이다."

(정로 71)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분의 사랑과 평안이 사역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2년 넘게 키쿰비 사역을 지원해 주고 계시는 노귀환 목사님, 그리고 약품과 중고옷, 기타 물품을 후원해 주신 여러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