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25

늦은 저녁, 거울 앞에 서서 오른쪽 코 밑으로 번지고 있는 하얀 얼룩을 들여다보다 별안간 소리쳤습니다. “여보, 나 한국 가야겠어.” 얼굴에 낯선 반점이 생긴 건 4개월 전, 어느 안식일 오후였습니다. 침례식 사진을 몇 장 찍고 난 후, 카메라를 정리하고 있는데 남편이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라 이러는 것입니다. “이게 뭐야. 얼굴에 하얀 게 생겼어!” 정말 오른쪽 볼 귀 옆에서부터 입술 아래로 마치 누군가 흰 색 붓을 휘두른 듯 흰 반점이 군데군데 생겨난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심장이 벌렁대는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탄자니아에서 흔히 보는 눈썹도 하얗고, 머리카락도 하얗고, 전신이 붉은 알비노 환자들처럼 나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움이 옴팍 몰려왔습니다. 찾아간 병원에서는 열대 지방에서 흔히 생기는 어루러기라며 연고 하나를 처방해 주었는데 낫기는커녕 이제는 오히려 다른 부위로 번지는 중이었습니다.

 

한국에 갈 때마다 교민들이 운영하는 여행사를 통해 티켓을 구매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도 아닌 듯싶어 조급한 마음으로 인터넷을 켰습니다. 언제 들었는지 엄마, 우리 한국 가요?” 흥분하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생전 처음 보는 트립스타(tripsta)란 여행사에서 단 두 시간 만에 예약, 결제, 발권을 마친 후, 다음 날 새벽 2시 반, 전자항공권을 확인했습니다. 한국은 아침 9시일 터. 엄마께 전화를 걸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당일 오후 535, 한국에 도착한다는 황당한 통보(?)를 드린 후 짐을 싸려고 가방 두 개를 꺼냈습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저에겐 한국 겨울에 맞는 옷이 없어 넣을 것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별일 아니겠지? 어루러기도 번지나? 진단받고 3주 만 있다 와야지싶어 개중, 가장 두터운 옷들로만 골라 일단 가방을 꾸렸습니다. 정신없는 세 사람을 대신해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을 후루룩 마시고는 나이로비로 출발, 한국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2016. 12. 26

도착하자마자 바로 찾은 한 피부과. 의사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건조한 말투로 백반증이네요.”라고 하더니 빠른 글씨로 연고 이름을 써내려가다 “3개월 정도 걸릴꺼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백반증이란 말에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광선치료실로 들어갔습니다. “눈을 감으세요.” 뜨뜻한(?) 광선이 제 온 몸을 1분가량 쪼여주었고, ‘안면에 환부가 있는데 왜 온몸에 할까?’란 궁금증도 잠시, 왠지 뻣뻣한 분위기에 이유도 묻지 못한 채 병원 문을 나왔습니다.

 

2016. 12. 28

며칠 뒤,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제게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송화야, 오늘은 교보에 가보자.” 밤마다 몸 구석구석으로 반점이 퍼지는 꿈을 꾸다 잠을 설치는 통에 그날 아침은 무척이나 피곤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광화문에 가는 건데도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지요. 겨우 엄마 손에 이끌려 간 교보. 검색대에서 백반증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10권도 넘는 책들이 주르르 뜨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첫 번째 목록에 있던 백반증, 발병부터 완치까지란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여러 임상 사례와 사진들이 빼곡히 담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안면 부위별로 환자들을 분류해 놓은 그림을 보고는 제 사례다 싶어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백반증 환자 가운데 10%에 해당하는 분절형은 완치가 가능하며, 완치 후에는 재발하지 않고, 다른 부위로 번지지 않는다.’ , 그 짧은 한 문장은 컴컴했던 제 마음 한복판에 희망이란 두 글자를 번쩍 올려놓았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엄만 걱정 안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낫게 해주실 거야.” 등을 토닥이는 엄마 너머로 교보문고 안의 모든 것, 책을 읽는 사람들, 서가에 꽂힌 책들이 햇살 받은 들꽃처럼 영롱히 반짝였습니다.

 

2016. 12. 31

어릴 적, 동생이 몹시 아팠던 때가 있었습니다. 서울대, 이대 등 내로라하는 대형 병원의 의사들은 다음과 같은 예후를 쏟아내며 한결 같이 겁을 주었지요. “이 아이는 평생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 엄마 나이 고작 서른. 그런 자식의 운명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의 삶도 그와 함께 멈춰버릴 테니까요. 하루 두 번 먹는 하얀 알약으로는 모자랐습니다. 푸르고 진한 측백나무 이파리를 뜯어다 날마다 갈았습니다. 겨울에 먹일 환을 만들기 위해 한여름에도 연탄을 떼어 온방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한번은 아기 태반이 좋다는 말에 사긴 샀는데 도저히 만질 수가 없어 한 집사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일. “그때 윤집사가 형, 나 이것 좀 해줘. 그러기에 수돗가에서 피를 다 빼서 푹 삶았지. 누르스름한 물이 나오기에 담아다가 줬던 게 생각나네.” 엄마 표현대로 그땐 정말 반 미쳐서 눈에 뵈는 게 없었습니다. 법원리 너머에는 문둥병 환자촌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도 유명한 옥도정기, 빨간 소독약이 들어가는 작은 유리병에 어른 검지만큼 시신에서 내린 물을 받아 마시면 낫는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두말 않고 15만원을 주고 샀습니다. 그 후에도 몇 번을 더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7년이 지난 어느 날, 속이 쓰리고 도무지 소화가 안 되어 찾은 한 병원에서 위벽에 염증이 농후해 위암 초기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간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정 집사님에게로 달려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약 잘 챙겨먹어라.” 어린 자식에게 신신당부를 하고는 하동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기도하고, 찬미 부르고, 성경을 가지고 이 방 저 방 찾아다니며 오히려 환우들을 위로하다 3주 만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약 먹었니?” 약통에 약이 그대로인걸 보고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동생은 엄마가 없는 동안 약을 먹지 않았다고 그래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이실직고했습니다. 끝도 없을 것 같던 고통이 어느 순간 멈췄습니다. 예기치 못한 때에 그렇게 조용히 끝나버렸습니다. 저희 가족은 지금까지도 동생이 어떻게 나은건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좋다 여기는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적처럼 동생을 치료해 주셨고, 그렇기에 누군가 어떻게? 언제? 누가? 라고 물으면 저흰 모두 말없이 하늘을 가리킬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거울 앞에 서서 25도 각도로 고개를 비틀고 얼룩이를 들여다보는 저를 보며 엄만 말합니다. “하도 그리워하니까 널 보내주셨나보다. 엄마아빤 너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엄만 내 백반증이 하나도 걱정이 안 되나 봅니다.

 

2017. 1. 23

여긴 숙대입구역. 발그스레한 볼 화장에 싱그러운 웃음이 어여쁜 여대생들. 20대 땐 몰랐는데 40대를 코앞에 두고 보니 젊다는 게 왜 좋은지 알 것만 같습니다. 그저 이어폰을 끼고, 책 한권 들고 종종걸음을 걷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당고개역에서 병원까지 오고가는 동안 두 눈을 즐겁게 해주는 한국의 활자들. 6년간 한 번도 읽지 못했던 신문도 사서 읽어보고. 3분간의 엑시머 치료를 위해 3시간을 왕복하는 길이건만 오랜만에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습니다. 내 나라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하고,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모습조차 담뿍 정이 갑니다.

 

우연을 가장한 하늘의 섭리로 교보에서 그 책을 만난 이후, 책의 저자가 운영하는 피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원장님은 국내최고의 백반전문의로 지난 30년 간 운영해온 병원은 얼마나 유명한 곳인지 내국인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온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예약을 하더라도 수십 분은 기본으로 기다리는 동안 마주치는 수많은 환자들을 보며 오히려 내 병변이나 예후는 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안심이 될 때마다 되레 미안한 맘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다 나오는 날들도 많아졌습니다.

 

또 한 가지, 병원에서 인삼이나 홍삼 또는 오가피와 같은 면역증강제는 피하라는 주의사항을 듣자 퍼뜩 제 작년 12월 일이 생각났습니다. 한국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머리를 좀 다쳤던 때라 엄마께서 온갖 귀한 약제를 달여 보약을 한 첩 지어주셨습니다. 나이로비까진 잘 가지고 온 것 같은데 막상 아루샤 집에 와보니 보약이 든 상자만 없는 것입니다. 순간 수화물을 모두 찾아 공항 밖에 세워둔 차에 싣긴 실었는데 마지막으로 반드시 실었어야 할 그 상자는 어떻게 된 게 바닥에 그냥 두고 트렁크 문을 닫은 후, 국경을 향해 출발해 버렸다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 집에서도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다 홍삼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떨어뜨리고 말았지요. 매우 아까운 또 죄송한 일이었긴 하지만 저 같은 환자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던지요.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2017. 2. 3

오늘은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한 사모님이 저를 보더니 각오하고 마음 단단히 먹어요.” 하십니다. 다른 집사님은 저를 가리키며 어머, 어떻게 해. 백납이 왔네.” 걱정이 가득하십니다. 반대로 어떤 집사님은 피부는 계속 변해. 분명히 나아질 꺼에요. 두고 봐.” 하시네요. 갑상선 수치가 좋지 않아 찾았던 내과의 한 의사 선생님도 몇 달 간 갑상선염을 앓았다 최근에 회복 중인 것으로 보여요. TSH 수치는 아직 안 좋지만, 피부는 일시적인 것 같으니 차차로 나아 질거에요하시고, 엄마 역시 보면 볼수록 어째 점점 쪼그라든다.” 하십니다. 누구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저를 두고 하는 모든 분들의 말을 종합해 보니 딱 두 가지 타입이 존재하더군요. 긍정적이냐 아님 부정적이냐. 사람이 자동적으로 내비치는 반응 그리고 방어 기제가 긍정적이냐 혹은 부정적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도 그렇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맞는 말입니다. 동아의대의 김철권 교수는 단어는 유유상종한다. 당신이 사용하는 단어는 당신을 인도하는 북극성이다. 용기, 숭고, 열정, 위대. 이런 단어를 가슴에 안고 살면 그 단어는 그에게 맞는 다른 단어를 끌어당긴다. 비참, 우울, 슬픔, 못남. 이런 단어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면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려 당신을 지배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저도 결심했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처럼 나도 믿음을 핵심 단어로 품고 살겠다고... “하나님이 계시잖아, 날 낫게 하실 거야. 탄자니아로 돌아갈 수 있어.” 믿음으로 숨 쉬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2017. 3. 13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20:9, 10) 모두가 죽었다 하는데 바울은 아니다,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말합니다.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외적으로, 사실적으로, 인간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 생기가 닿으면 다시 들숨 날숨이 오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제 얼굴의 분절형태는 멜라닌 색소가 갑작스레 자멸하여 피부 보호막이 전혀 없는 사막화 상태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죽은 피부나 다름없다는 것인데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네 피부에 있다라고 말씀하시네요. 이 말씀에 반응이라도 하듯 입술 바로 밑, 1cm가 넘는 가장 큰 하얀 반점 주위로 얼마 전부터 정상 멜라닌들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반점 안쪽으로는 검은 점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고요. 얼마 전엔 원장님도 다시 카메라를 꺼내어 비포 앤 애프터(Before VS After) 사진을 찍으시며 많이 나았는데요?’하셨답니다.

 

2017. 4. 28

식탁 위에 자그마한 메모지를 놓고 엄마와 마주 앉았습니다. “엄마, 녹즙 값이라도 제가 계산 할께요. 야채가 다 얼마에요?”하고는 케일, 레몬, 비트, 감자 등등 야채이름을 쭉 썼습니다. 3주를 예상하고 왔는데 어느덧 4개월 째. 계절도 바뀌어 옷장 안엔 남대문에서 사 오신 봄옷이 또 가득합니다. 녹즙 재료라도 사야할까 싶어 여쭈어 보았더니 갑자기 엄마가 식탁 위에 얼굴을 파묻고는 엉엉 우십니다. “난 그렇게는 못하겠어. 그렇게는 못해. 너 그렇게 하고 가면 내가 다 해줬어야 하는데, 다 줬어야 하는데하고 엄만 또 울꺼다. 너 역시 내가 낼 건 냈으니까.’하고 네 할 일 다했다 생각하겠지. 그럼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모두 도둑질하는 거야. 요양원비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지불하셨으니 나아가지고 가거라.” 아빠 역시 송화 넌 내 딸이니까 편하게 있어.”하십니다. ,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펜과 메모지를 부끄러운 손과 함께 슬그머니 치웠습니다.

 

2017. 5. 25

거의 다 나았습니다.’라는 소견을 끝으로 다음 주 출국을 앞두고 있던 525일 아침, PMM 선교사님의 자녀를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1년 전, 상처 난 부위가 가려워 긁었는데 피부가 하얘졌고, 다른 부위에도 반점들이 생기고 있어 병원을 찾은 것입니다. 5개월 전, 같은 병, 같은 근심을 안고 같은 의자에 앉아 진료를 기다리던 제 모습을 보는 듯 해 처음 만난 사모님과 함께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먼 길 가듯 아득했던 치료 기간이 끝나는 시점인지라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 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당한 어려움이 내일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이를 능히 위로하기 위함(고후 1:4)이라는 것, 선교지에 돌아가면 우리는 덜 교만하고, 덜 민감하고,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하고, 자신의 유익에는 죽는 자”(증언 2, 566)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2017. 6. 15

엄마, 아빠는 딸과 두 손녀가 다시 탄자니아에 안착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시고는 615일 한국으로 가셨어요. “나의 백반일지는 함께 오셨던 최철수 목사님 말씀마따나 엄마가 탄자니아 집까지 오셔서 차려주신 보리굴비, 호박전, 우거지볶음, 갓김치 그리고 미역국 이렇게 정겹고 소담스러운 한국 백반을 먹으며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첫 개척지인 바라바이크의 땅 에쉬케쉬(Eshkesh)에 들어서자마자 자네, 난 송화 데리고 지금이라도 한국에 가고 싶네.”하셨다는 엄마는 한국에 도착해서도 이 땅의 제일 밑바닥 삶을 사는 가난한 영혼들에 대한 미안함, 아직도 눈에 생생한 우리집 부엌 상태(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은 싱크대 안의 장면들), 그리고 애들 침실 커텐이 짧은 것에 대한 근심 등등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으셨지만, 지금은 조금 기운을 차리셨다고 해요.

 

며칠 전, 엄만 아프리카 살다 아프면 언제든 다시 오라고 제 카톡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앞뒤 가리지 말고 엄마품, 엄마 가슴팍으로 밀고 들어와야 해.

황금 시간 놓치지 말고.

그래야 내 자궁으로 난 내 새끼,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살리지.”

 

저도 그렇게 다시 살아 탄자니아로 왔습니다.

자기 살점 모두 내어주는 가시고기 같은 엄마 아빠 덕분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그동안 간절히 기도해 주시고, 치료에 도움을 주시고, 격려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이 시간을 빌어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지지와 격려로 선교지를 후원해 주고 계신 많은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사역지를 지켜주시고, 남편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뜨끈뜨끈한 선교소식으로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