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전 천명선교사로 지원했을때,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 오지로 가서 일하고 싶었다. 그런데 배정받은 곳은 Adventist 교회와 학교가 있는, 작은 마을의 70%이상이 교인인 마을이었다. 그곳에서도 분명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본부로 전화해 다른곳에 보내주실수 있는지, 혹 아프리카에 갈 수 있다면 자비로라도 가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때 당시 우간다에(내 기억으론 우간다가 맞는 것 같다)갈 수 있다고 답이 왔고 그것을 준비하려던 차 아직20대 초반의 딸자식을 먼 아프리카에 보낼 수 없었던 엄마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 할 일이 많고 갈 사람이 적은 곳, 또 거의 갈 뻔 했던 아프리카에 대한 꿈이 그렇게 생겨났다.

한국으로 돌아와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가겠다는 남자를 만났다. 나와 꿈이 같은 사람을 찾던 중 아프리카를 위해 평생 헌신하자는 남편의 프로포즈에 응해 이 시간까지 오게 되었다. 결혼 후 목회를 하면서도 우리의 꿈은 언젠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누군가 꿈을 자꾸 이야기하면 이루어지기 더 쉽다고 해서 더욱 그렇게 하였다. 생각하면 기분좋고 가슴 설레는 이름이었던 아프리카 선교사. 그래서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 생각하며 그때를 기다렸다. 2년전 PMM에서 콩고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대총회 소속 선교사로 갈 수 없다면 자급선교를 해야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프리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둘째를 낳아야 하는 시점이 3월 출국할 시점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했고, 또 누군가는 이미 그곳에 갈 사람은 준비되었다고 했다. 혹 다음에도 기회가 생길까 그럼 그때 내가 갈 수 있을까 막연히 생각했었다.

이번에 우간다로 갈 사람을 모집한다는 이야기에 우리 부부는 주저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남편에게 지원해보세요 라고 쉽게 이야기해놓고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설레고 기대되고 꿈이 실현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기도 없고 수도시설도 없는 차로도 갈 수 없었던 십년 전의 내 선교지가 꿈에 나타나면서, 그때는 나 혼자였지만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 가야하는데, 전기도 수도도 없는 선교지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실제적인 일들이 떠올라서 였다.

드디어 십년동안 아니 그 전부터 꿈꾸던 일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이르렀는데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 정말 내가 꿈꾸던 일이 맞는가? 그저 막연하게 이루어지기 힘들거라 생각해서 내 꿈으로 삼았을까?

몇일을 잠못자고 설치다가 남편에게 물었다. 정말 전기가 하나도 안들어 올까요? 세탁기는 쓸 수 있어야 할텐데, 선교지에 가서 4식구 빨래만 하며 살 순 없잖아요. 남편은 요즘 웬만하면 전기는 다 들어올거라 했다. 너무 미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약간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바라는 마음이 큰 만큼 두려움도 컸다. 큰 두려움 앞에서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인 것을 절실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10년전 20대의 선교사였던 나는 꿈과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으나 30대의 엄마로서, 또 일년동안 선교사 경험을 해본 PMM선교사로서의 나는 큰 두려움 앞에 떨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20대의 선교사는 스스로 무언가 이루려고 해서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30대의 선교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나약한 선교사는 하나님의 강한 손에 붙들려 주님의 사업에 쓰여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6년후, 처음 다짐한 것처럼 검은 대륙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기 원하는 진정한 아프리카 선교사로 다시 태어나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