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쉰들러 이야기

2002년, 교회지남


북한에서 중국으로 향한 길목이 6개월 전에 중국을 방문할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자동소총을 든 중국인민해방군 두 명이 통행하는 차량을 모두 세워 북한이탈주민을 색출하기 위해 눈에 불을 뿜고 있었고, 혹시 도주하는 차량을 예상해서인지 2선에 다시 자동소총을 들고 있는 두 명의 군인이 한 장교의 감독 아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지난 3월 25명의 탈북자들이 난민 지위를 요청하며 주중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든 이후의 변화였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탈주민을 돕고 있는 한 조선족 신자 김 선생(가명)을 만났다. 50을 넘긴 이 분은 지난 98년 이후 17명의 북한이탈주민을 돌보아주고 있었다. 북한에서 오는 주민을 인신매매의 대상으로 여겨 이익을 챙기고 있는 조선족들이 있고, 비록 교회라 할지라도 중국 정부를 염려하여 북한이탈주민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김 선생이 얼마나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희생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었다.

98년 어느 날 산 속에서 잃어버린 “오마니”를 찾고 있는 어린 소년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소년과 함께 산을 뒤지다가 북한에서 온 한 가족의 은신처를 발견했다. 은신처라야 허술하게 숨겨진 움막이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겨울을 날 수 있겠는가? 가련한 생각이 들어 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열일곱 명에 이르렀다. 공무원 신분에 누가 알기라도 하면 일가족의 생계가 암담했고, 출석하는 교회의 교인들마저 혹시 교회에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적은 급여를 받아 생면부지의 대식구들의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김 선생에게 맡기신 의무였다.

김 선생이 보호하고 있던 북한주민 가운데 네 명의 북한주민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무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간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서 다시 이들이 김 선생 앞에 나타났다. 이들이 돌아올 때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몇 사람을 더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김 선생은 두만강 강가에 살고 있는 친지에게 북한에서 넘어오는 이들을 소개받아 산 속이나 친척의 집에 이들을 보호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가르쳤다. 어느 정도 성경과 중국어를 배우게 되면 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하게 하고 이들이 채취한 산나물을 시장에 내다팔아 얻은 수입을 이들의 손에 들려주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들은 복음과 함께 얻은 수입을 갖고 북으로 돌아가 가족을 부양하고는 다시 김 선생에게 돌아오곤 했다.

김 선생의 보호를 받은 이들 가운데 70을 바라보는 한 분은 평양에 살다가 지방 도시로 숙청된 분으로 장로교회 목사인 할아버지가 50년 대 후반에 순교를 당했다. 숨어서 혼자 장로교 신앙을 이어오던 이분이 김 선생을 만난 것은 지난 해 12월이었다. 두 달 동안 은신처에 숨어서 김 선생으로부터 성경을 배우며 안식일 진리를 회복했다. 대쟁투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읽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큰 감동을 주는 책이기에 아예 뒷부분은 노트에다 베껴 쓰기 시작했다. 책을 구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가슴에 이 말씀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

김 선생의 소원은 속히 북한에 들어가 자유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이었고, 김 선생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이들의 소박한 소원은 중국에서의 정착이나 남한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액수라도 손에 돈을 쥘 수 있다면 속히 북한으로 돌아가 그들이 새로 영접한 예수님의 향기를 남모르게 뿌리는 일이었다.


2002년 한국연합회 국외선교부장 재직 당시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