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고난

  2007년 10월부로 새로운 외국인 비자법이 발효되었다. 지난 1월에 법이 개정되었는데 올해만 두 번째이다. 이 법에 의하면 선교사는 3개월 이상을 러시아에 연속하여 거주할 수 없다. 반드시 본국에서 비자를 다시 받아야만 러시아에 입국할 수가 있다. 선교사 생활가운데 이제까지 긴급동행, 모함과 멸시, 질병, 재정 곤란, 교회건축, 부친상등 많은 고비를 넘겼지만 이번만큼은 만만치 않은 장애를 만나게 된 것 같다.

  선교사의 길은 왜 고난이 많은 것일까? 혼자 생각해본 해답은 선교사의 길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길이 그런데 그 길이 왜 그런가 하고 물으면 선교사의 길이 본래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교사를 힘들게 하는 선교지의 고난의 삶은 선교사에게는 필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결과이며 교차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운명이다. 선교사역은 고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교사의 사명이 고난을 부르기 때문이다. 선교사명을 받아들인 순간 일신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하고 인도로 나아간 윌리암 캐리, 중국으로 달려간 허드슨 테일러, 수많은 반대에도 아시아에 재림기별을 전한 아브람 라루등 이전 선교사들의 생애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도 생사의 위협과 핍박 가운데 그리스도를 전하는 회교권 선교사들과 공산권 선교사들, 원시 밀림 속에서 단절의 생활을 감내하는 오지 선교사들, 무에서 복음으로 유를 창조하는 개척 선교사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때로는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때로는 영혼들의 돌팔매를 온 몸으로 맞으며 사명을 위해 여전히 고난의 바다에 자신을 던진다. 이처럼 선교사명은 고난으로의 부르심이지만 또한 선교사의 고난을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아름다운 헌신과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찬양하게 한다.  

  둘째로, 삶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느끼는 영하 30도의 시베리아 바람은 따뜻한 남쪽나라 내 고향을 그립게 하고, 콩나물조차 귀한 먹거리는 엉성한 청국장이라도 만들기라도 하면 마냥 행복하게 한다. 물이 다르고, 날씨가 다르고, 길이 다르고, 집이 다르고, 길거리에 자라는 나무와 풀이 다르다. 법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인사가 다르다. 온통 이전에 보던 것과는 다른 것 투성이다. 처음에는 낯설어서, 조금지나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때문에, 나중에는 현지 사람들과 똑같이 변해가는 자신 때문에 스트레스다. 어떤 때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몸이 안 따라 줄 때가 있고 몸은 원하는데 마음이 원치 않을 때도 있다. 주어진 환경이 사명을 이기는 순간은 좌절을 넘어 절망에 이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선교지를 떠나면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선교지의 모든 것이 추억이며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셋째로, 선교사가 구원해야할 영혼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긴 것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다.  ‘아’하면 ‘어’하고 알아듣고 ‘여’하면 ‘야’하고 알아듣는이가 있다. 예전에 모국에서 만나던 사람들과 사람이 너무 다르다. 이들과 하나되는 것도 힘이드는데 구원해야할 이 영혼들이 자기들만의 고난과 더불어 씨름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선교사는 죽을 맛이다. 불쌍해서 마음이 아프고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믿었던 사랑이 도끼가 되어 발등을 찍을 때는 사람이 싫어진다.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워진다. 이런 사람이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험거리가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마음의 색안경이 되어 사람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측은지심이 절로난다.  

  넷째로, 선교사의 개인의 한계가 고난을 부르기 때문이다. 피할 수도 있는 고난을 자처하기도하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을 지레 겁먹고 주저앉기도 한다. 선교사로서 준비가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작은 어려움이 큰 고난이 되기도 한다. 거부할수록 도망치고픈 마음뿐이고 피할수록 더욱 다가서는 것이 선교지의 문제들이다. 내가 이렇게도 못난 사람임을 절감하는 곳이 선교지이다. 많이 배운 것들이 현실에서 도움이 되지 못하는 때가 많다. 하늘보며 무릎으로 살고 가족이 힘이 되며 동역자가 격려하면 고난은 성숙한 선교사의 밑거름이 된다. 그래서 함께하는 선교는 고난을 이기는 최대의 무기이다.
  
  끝으로 선교지는 돈이 고난을 부르기 때문이다. 없으면 없어서 탈이고 많으면 많아서 분란이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돈들이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된다. 고사리 손으로 6년 동안 모은 초등학생의 저금이 교회의 벽돌이 되기도 하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드려진 값진 돈이 카지노의 쓰레기 돈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생명같은 돈이 어떤 이에게는 물이 되고 누군가의 푼돈이 한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열 번 주다 한번 안주면 떠나가기도 하고 은혜를 따라 나누다보면 감동의 눈물이 되기도 한다. 돈이 거듭나지 않는한 고난은 선교사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역사상 고난없는 선교는 없었다. 휘어진 톱날의 몸부림치는 떨림이 아름다운 소리가 되고 음악이 되듯이 선교사의 고난의 몸부림으로 태어나는 것이 새로운 영혼이고 그 과정이 선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의 고난은 축복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고난의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고난을 벗삼아 고난의 주님을 따르는 쓰디쓴 희열을 누려보자. 고난을 이긴 자만이 누리는 승리의 면류관은 오늘도 선교지에 넘쳐나도록 쌓여있다. 결국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 이것이 선교의 기본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