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인 선교사 

  북한에서 예배를 드리던 80여명이 체포되었다. 지난 3월에는 새로운 종교법이 발표된 후 중국에서 가정교회 지도자 100여명이 불법집회를 했다는 명목으로 붙잡혔다. 세계는 급속도로 개방과 교류를 지향하며 변화하는데 오히려 종교적으로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 더욱 탄압과 핍박을 강화하는 지역이 있다. 중국도 북한도 그렇고 중앙아시아도 그렇다. 베트남과 라오스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를 비롯한 서남아시아,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있는 중동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통적인 선교가 허락되지 않는 선교의 금단(禁斷)지역이다.    

   하지만 오픈도어 선교회에 의하면 기독교 선교사의 입국을 원천적으로 제한하거나 강하게 규제하는 나라들도 교수, 컴퓨터 전문가, 언어전문가, 학생, 체육인등....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직업인으로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전문인 선교사에게는 여전히 선교 가능성이 열려있다. 북한에 구호단체 아드라의 활동과 유기농 기술자, 중국에 사업가와 대학교수, 아랍에 영어교사와 전기기술자등의 예에서 보듯이 아직 폐쇠된 사회나 국가에서는 목회자나 순수 선교사보다는 전문인 선교사가 필요하다. 복음전도 활동과 시간에 제약이 존재하며 깊이 있는 신앙적 활동이 어렵다는 맹점이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복음 전도를 위하여 선교사로 입국조차 어려운 국가에 대한 다양한 입국루트와 장기적인 체류 비자를 확보할 수 있으며 최소한의 재정적인 자립이 가능하다. 그리고 전문적 지식과 기술로 생활현장에서 날마다 다양한 영혼들을 만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줌으로 복음을 전하기에 용이하다.

  북한과 중국선교, 그리고 세계복음화를 위한 선교 사명완수를 준비하는 한국교회는 이제 전문인 선교사를 양성하고 파송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목회자 위주인 선교사 파송을 다양화하여 선교를 준비하는 전문인 평신도를 선교지에 파송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강구해야만 한다. 이미 전략적인 선교지에서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헌신적인 성도들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획일적인 선교패턴을 다양화하여 선교지의 각종 제약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교사운동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혹은 목회자 선교사라도 선교지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전문적인 자격과 지식을 갖추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효과적인 선교사역에 도움이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설교하고 전도하는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므로 찬양을 통한 음악선교사, 영농기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농업선교사, 학교와 학원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육선교사, 병든 자들을 치유하는 의료선교사들을 통하여 문화선교, 산업선교, 교육선교, 의료선교등 다양한 선교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와 전문분야의 활동사이에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것인가 고민해야한다. 자칫 순수한 사회봉사에 그치거나 영혼들과의 접촉에만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한 바울은 천막을 깁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하여 자비량 선교사(Tent-maker)가 되었다(고전9:7). 복음전도의 열정으로 충만한 헌신이 삶 속에서 영혼들에게 말씀으로 선포되었고, 처지와 형편에 맞게 구원의 기별로 가시적으로 제시되었다. 선교지에는 목회자도 선교사로 필요하지만 다양한 기술을 가진 헌신적인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도 필요하다. 아니 오히려 복음에 닫힌 국가에서는 오히려 전문인 선교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지금쯤은 한국교회도 전문인 선교사를 위한 선교의 장을 마련하여 업그레이드된 선교운동을 펼쳐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내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