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해외선교 100년 약사

2003 교회지남 원고

권정행/한국연합회 국외선교부장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시작부터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해야 할 역사적 선교적 사명을 띄고 태어난 교회이다. 안식일교회는 1863년 대총회를 조직한 지 11년 만인 1871년에 교단 최초의 선교사인 죤 네빈스 앤드루스 목사를 유럽에 파송한 이후 세계 선교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조직과 제도를 정비해나갔다.

내년이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교회가 100주년을 맞게 된다. 한국인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종교적이어서 이 땅의 여러 종교가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국인의 수입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가 그랬으며, 천주교회가 그랬고 안식일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단의 선교는 미국 내의 외국인들을 위한 선교에서 시작하여 유럽과 호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1904년에 한국에 전파된 지 6년째 되던 해에 있었던 경술국치에 의해 만주로 강제 이주한 동포들이 기별을 가져가 국외선교가 시작되었다. 미국교회가 자국내 외국인들을 위한 전도에서 선교가 시작된 반면, 한국교회는 외국에 있는 자국인들을 위한 전도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10년, 원산에서 시조(당시 세천사의 기별)를 받아보고 교인이 되었던 최영식씨가 만주로 이주하여 여러 사람을 인도했을 때, 조선대회는 1912년에 안창모(安昌模)씨를 간도로 보내 이들을 돕게 했는데 이것이 선교사 파송의 효시가 되었다. 한국에서 파송한 사역자들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국경 밖 만주가 북선대회의 선교지역으로 포함되어 있다가 1931년에 이르러서야 만주합회로 이관되었다. 그후에도 문서전도만큼은 여전히 한국에서 주관하였다.

미국에는 1905년, 멕시코에느 1910년, 일본에는 1926년, 싱가폴에는 1939년에 각각 첫 한국인 안식일교인들이 들어갔지만, 한국교회의 선교 정책의 결실이 아니라 이민이나 유학생 또는 사업 목적으로 입국한 교인들에 의한 것이다. 일본과 미국과 캐나다와 남미로도 목회자들이 이주하였다. 선교사로 파송된 것이 아니라 안식일교인 유학생이나 이민자들이 먼저 그 땅에 정착하여 집회소가 생길 때에 이민한 목회자들이 교회를 돌보는 형식이었다. 이후 미국에는 100여개에 가까운 한인교회들이 생겨났으나 이것 역시 한국에 있는 모교회(母敎會)의 선교정책의 성과가 아니었다.

1968년에 브라질 한인교회로 신병훈 목사가 파송되었고, 1974년에 일본으로는 김석만 목사가, 1985년에 파라과이로 류영렬 목사가, 아르헨티나로 이근호 목사가, 1988년에는 필리핀으로 문영석 목사가, 1989년에는 파라과이로 유진왕 목사가, 1992년에는 중국으로 윤선홍 목사가, 독일로 심우창 목사가, 러시아로 유영길 목사가, 1995년에 호주로 김명수 목사가, 1998년에 페루로 윤여원씨가, 1999년에 정근태 목사가 우즈베키스탄으로, 2001년에 키르기즈스탄으로 지명훈 목사가, 뉴질랜드로 윤건식 목사가 각각 파송되었다. 이들은 세계의 각국으로 한국에서 파송한 첫 번째 목회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해외로 파송한 선교사들의 사역이 디아스포라(자국민) 선교에 국한한 것이 안타깝다. 같은 문화와 동일한 언어와 민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안식일교회에 맡겨진 세 천사의 기별은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해야 할 기별인 데 말이다.

재외 한국인 신자들을 위한 한국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가 평신도였듯이 한국교회의 첫 번째 선교지 현지인들을 위한 선교사 역시 평신도로서, 1968년에 리비아의 벵가지 병원으로 파송된 오혜자, 조정자 간호사, 그리고 1973년 홍콩 위생병원으로 파송된 김은희 간호사가 션교지의 현지인들을 위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이어서 1981년에 이재룡 목사가 필리핀의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부름을 받아 출국하였고, 이듬해인 1982년에 김동준 목사가 당시 싱가폴에 있었던 원동지회 총무부에서 봉사하기 위해 출국함으로 해외의 교육 및 행정기관을 위해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세계 선교에 기여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이다. 캐나다 시민권자로 앤드루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유영길씨가 1985년 중국에서 영어학원을 시작하며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시대를 열었으며, 1990년 삼육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유영길 목사가 하바로브스크와 사할린을 방문하다가 1991년 10여명의 삼육대학생들의 참여로 한국교회의 러시아 선교가 시작되었다. 역시 평신도들이 한국교회의 세계선교 문을 연 것이다. 1992년 한국연합회는 유영길씨를 하바로브스크 주재 목회자로 파송을 결의하고 이어서 김현수 목사를 파송하며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러시아 선교 시대가 열렸다. 김현수 목사는 사할린에 러시아삼육대학교를 세우기에 이른다.

1992년 10월 28일, 30명의 청년들이 필리핀의 AIIAS 신학대학원장으로 재직하던 이재룡 박사가 주창한 1000명 선교사 보내기 운동의 1기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한국청년 700여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세계 각국에서 모여온 2,700명의 재림청년들이 28,000명의 수침자를 내면서 1000명 선교사 운동을 통해 새로운 선교시대의 장을 열었다.


2003년 4월에는 다섯 명의 목회자 가족들이 개척선교운동(Pioneer Mission Movement) 선교사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계 인구의 1/4이 살고 있는 아시아에서 아직 영원한 복음이 세력을 이루지 못하는 이웃 국가들에 대한 빚진 자로서의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거보를 내디딘 것이다.

한국교회 100년 역사에 선교지의 현지인들을 위한 직접적인 선교는 대만으로 떠난 윤선홍 목사(1998년 9월 1일)와 이장호 목사(1999년 3월 1일)가 시작했다. 윤선홍 목사는 중국에서 봉사하는 동안 중국어를 익혔고, 이장호 목사는 삼육의명대학에서 관광중국어통역과장으로 재직하다가 대만으로 떠났다. 이들은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형식이 아니라 대만대회가 현지에서 채용한 경우로, 이들은 대만에서 가장 커다란 두 교회에서 현지인 교인들을 섬기며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들을 많이 파송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단일 민족으로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에게 선교의 선교의 최대의 장벽은 언어이다. 다만 언어의 장벽 없이 선교할 수 있고 다른 민족에게 넘겨줄 수 없는 우리의 고유한 선교지는 북한이다. 모든 교단이 이를 위해 준비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한국 안식일교회가, 성숙한 자세로 세계 선교에 앞장서면서 북한선교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일은 안식일교회 역사 100년을 맞이할 한국 안식일교회의 큰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