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일 안식일

일몰오후 517

 

기억절 :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16:7).

 

연구 범위 : 28:12~17, 14:12~15, 1:6~12, 3:1~5, 요일 4:10, 딤후 4:8, 36:23~27.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라는 성경적 개념을 통하여 현실을 이해한다. 철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대쟁투는 거대 담론’(metanarrative), 즉 우리 세계와 그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을 설명하는 크고 포괄적인 이야기이다.

이런 대쟁투의 중심에 성소가 있다.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 구속사에서 시종일관 되풀이되는 주제이다. 우리가 성소 기별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하늘에서 처음 대쟁투가 시작되었을 때에 사탄이 공격했던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주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서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진실과 사탄의 거짓을 드러내는 대쟁투의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공부하려고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사탄이 하늘에서 처음 반기를 들었을 때 공격의 핵심은 무엇이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그분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는지 이해한다.

느끼기 :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드러났는지 인식한다.

행하기 : 하나님을 내 생명의 주로 모시고 꾸준히 그분 안에 거한다.

 

A.

여러분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에 얼마나 공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이런 말에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 이런 논리는 우리 생활에서도 공감할 수 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품성을 어떻게 공격합니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공의가 아니라고 트집을 잡는다. 성도가 허물에 빠지면 사단에게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의 공격을 방어하고 이기셨던 방법에서 우리는 어떤 깨달음을 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와 봉사와 희생으로 이 공격을 이기셨다.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도 인내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대쟁투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일지 서로 이야기해 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승리한다.

 

B.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사탄의 고소에 대하여 십자가가 해답이 되었습니까?

예수의 십자가로 공의가 집행되고 그 십자가로 죄를 용서함으로 사랑이 증명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통해 궁극적으로 증명되고 인정되어야 할 사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과 그분은 의롭고 자비로운 분임이 인정되고 증명된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사탄의 조롱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

입니까?

예수 생명으로 빛을 비추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전 우주 앞에서 자신의 의를 옹호하셨습니다. 의로운 사랑의 능력이 마침내 승리하였습니다.

 

첫째 날() 하늘 성소에서의 반란

1215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28:14~15).

 

1. 28:12~17과 사 14:12~15을 읽어 보라. 루스벨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

[28:12~17]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4:12~15]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 지혜가 충족한 것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데서 시작되었다.

 

언뜻 보았을 때 겔 28:12은 단지 지상 왕조에 대한 설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이 성경절은 분명 사탄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이 사람은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다(28:14). 그의 지위는 지성소에서 법궤와 하나님의 임재를 가렸던 두 그룹을 연상시킨다(37:7~9). 이 천상의 존재는 또한 하나님의 동산 에덴”(28:13)하나님의 성산에서 불타는 돌들”(28:14) 사이를 거닌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모두 성소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13절에 나오는 아홉 가지 장식용 보석도 제사장의 흉패에 사용되는 보석들로서 역시 성소 배경을 암시한다(39:10~13).

그룹의 휘황찬란한 외모를 묘사한 후에 에스겔 28장은 그의 도덕적 타락으로 주제를 전환한다. 그는 자신의 영광에 도취했다. 그의 아름다움은 마음을 교만하게 했고, 그의 빼어남은 그의 지혜를 부패시켰으며, 그의 무역(거래)’(아마도 하나님의 품성을 비방하고 반란을 주동했던 활동)은 그를 난폭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 교만한 세력은 땅에서 하늘로 진출하고자 하지만, “아침의 아들은 다른 방향으로 간다(14:12~15).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이는 그의 기원이 지상이 아닌 초자연적 세계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뭇 별 위”, “북극 집회의 산”, “지극히 높은 이와 같은 구절들은 그가 천상의 존재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12~13절은 과거시제지만 15절은 갑자기 미래시제로 바뀐다. 이런 시제의 변화는 그가 처음에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지만(14:12) 미래에는 땅에서 스올(무덤)로 나락할 것을 예견한다(14:15). 따라서 이는 루스벨에 관한 언급이지, 어떤 바벨론 왕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부가설명> 우리가 루스벨이라고 말하는데 루시퍼가 더 바른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명칭을 너무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원어발음은 아니니까 말이다. 루시퍼(Lucifer)라고 번역한 말의 히브리어는 헬렐이다. 이것은 밝은” “빛나는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계명성이라고 번역했는데, 새벽별이라는 말이다. 그는 보이는 신성이 충만하신 말씀하나님께 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하나님의 외모대로 그가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말씀하나님과 같은 상태의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씀하나님처럼 집회의 산에 보좌를 펴고 앉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씀하나님은 창조주요 루시퍼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집회의 산에 보좌를 놓을 수 없었다. 집회의 산에 보좌를 놓으려는 것이 바로 교만이었으며 그가 찬란했기 때문에 자신을 말씀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의 지혜와 생김새가 말씀하나님과 같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점에서 그는 말씀하나님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 말씀하나님은 그의 창조주였고 루시퍼는 말씀하나님의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피조물이었다. 그가 하늘성소 곧 보좌에 덮는 그룹이었어도 그는 피조물이었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동등하려는 데서 우주에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너무 아름다웠고 지혜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말씀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예수님으로 세상에 사셨다. 그분은 사람과 똑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다. 그분이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 사람과 똑 같은 존재로 여기면 루시퍼의 허물을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교훈 : 하늘 지성소 즉 하나님의 보좌 곁에 있던 존귀한 천사 루스벨은 스스로 타락하여 하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 땅으로 쫓겨났다.

 

 

둘째 날() 고소

1216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1:11).

 

사탄은 하늘에서 떨어진 뒤에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하고 비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지상 최초의 성소 에덴에서도 그랬다(3:1~5). 사탄은 하늘 성소에서 시작된 반역을 지상의 에덴 성소에도 끌어왔다. 뱀을 매개로 먼저 하와와 접촉한 그는 그녀의 마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유익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심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교묘하게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하였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켜서 일시적으로 이 세상의 권좌에 앉았다. 성경의 몇 구절을 보면 그는 정당한 주인이 아닌 일종의 탈취범으로서 지구를 소유한 이 세상의 임금”(12:31) 자격으로 하늘 법정에 출입할 권한을 다시 얻은 것처럼 보인다.

 

1. 1:6~12과 슥 3:1~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대쟁투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1:6~12]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3:1~5]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참소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대적하므로 이어진다.

 

우리는 위의 말씀을 통해 하늘에서 벌어지는 대쟁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사탄은 욥의 의가 자신이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시리라 믿는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즉 욥은 하나님을 존경해서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유익을 위할 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을 섬긴다 해도 복을 받지 못하면 욥은 믿음을 포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제사장 여호수와(성소 관련 주제)와 다른 신자들의 경우(12:10 참고)에 대하여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말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참소하고 그들의 죄상을 할 수 있는 대로 과장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가망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호와 앞에 그들의 악행과 결점을 낱낱이 고발한다”(실물교훈, 167).

두 가지 경우 모두 핵심 문제는 하나님의 공의이다. 모든 고소의 배후에서는 하나님이 죄인을 다루실 때 공정한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의 품성이 시험대에 올라 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면 그것은 과연 공정한 일인가?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면 하나님은 과연 공의로우신가? 그분이 정말 공의로우시다면 불의한 자들을 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 자비로우시다면,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2. 어떻게 하나님은 공의로우면서 동시에 자비로우실 수 있는가?

 

: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행되었고 그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을 때 용서로 시행된다.

 

<부가설명>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사람들이 행한 일에 대한 공평과 용서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이미 생명을 잃어버려 사망이 된 사람들을 다시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집중되어 있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주신 영생의 생명을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미 반납하여 그 생명은 없어졌다.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기 때문에 사망이 집행되기 전에 영원한 생명은 없지만 일정한 기간 생육할 수 있는 자비를 허락하셨는데, 이것은 아담이 죽은 그 사망을 여자의 후손이 대신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독생자가 오셔서 아담이 영원히 죽어야할 그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시고 부활하셔서 아담이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셨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한 선언이 집행되어서 공의가 이루어졌고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자비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6:35)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교훈 : 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품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분의 품성을 공격하였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공격한다.

 

 

셋째 날()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옹호

1217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25~26).

 

하나님이 사탄의 고소를 기각하고 그분의 절대적인 사랑과 공의를 증명하리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그분의 공의는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로 형벌을 요구한다. 반면 그분의 사랑은 인류를 하나님과의 교제로 회복시키려고 한다. 어떻게 하나님은 이 둘을 동시에 증명하실 수 있을까?

 

1.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어떻게 동시에 증명하셨는가?(요일 4:10, 3:21~26)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3:21~26]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하여 완전히 드러났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완전한 의미가 밝혀졌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도록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 3:16). 그리고 아들 하나님이 범법자의 형벌을 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도 증명하고, 율법의 요구도 만족시키셨다. 그렇게 그 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안에서 충족되었다.

또한 이러한 공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와 사랑도 드러내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대신하여죽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다. 이는 복음의 놀라운 섭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가 요구하는 형벌, 즉 법적으로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셨다.

3:21~26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주제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성경의 보석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3:26) 하신다.

성소 이미지는 예수님의 죽음의 뼈대를 제공한다. 지난주 우리는 그분의 죽음이 완전한 대속적 희생인 동시에 그분이 속죄소(3:25)라는 사실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 구약과 신약 모두 그리스도의 사명이 지상 성소 봉사를 통해서 예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부가설명>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85:10) 이 말씀이 십자가에서 공의가 증거되고 자비가 드러난 것을 표현하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가 잃어버릴 수밖에 없도록 한 그 생명을 대신 내어주시고 부활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5:8 참고) 사람이 죄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형벌하심으로 형벌을 받는 것이기보다는 그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일어나는 상태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바로 사망이 되는 것이다. 사망이 된 후에는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생명이신 분이 그에게 생명을 주어서 살려줄 때에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바로 불법이다. 그 사망은 실제적인 세력이기 때문에 처리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사망이 되셔서 사망을 처리하기고 사망의 세력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셨다.(2:14) 그래서 공의가 집행된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시고 우리로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공의와 자비가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이다.

 

교훈 : 십자가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며 우리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절대적인 공의를 증명하였다.

 

 

넷째 날() 심판에서 이루어질 옹호

1218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10~11).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비난에 대답할 수 없다”(교회증언 5, 472).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을 믿고 신뢰하며 따르는 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심판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온 우주 앞에서 하나님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1. 심판에 관한 다음의 성경절은 하나님의 품성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96:10, 13, 딤후 4:8, 16:5, 7, 19:2)

[96:10,13]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13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16:5,7]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 참 되고 의롭고 진실하시고 공평하신 분으로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품성은 그분의 심판에서 드러날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미 깨달은 바가 마침내 모든 인류에게 명백해질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18:25). 조사 심판을 포함하여 심판의 여러 국면은 (조사 심판 때에) 천사들과 (천년기에) 의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류를 공의롭게 취급하셨으며 모든 면에서 자비로우셨음을 증명하고 확신할 수 있게 한다.

 

2. 2:5~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어떤 위대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가?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동등하신 분이 사람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시고 사랑과 공의를 온전히 드러내신 예수님을 우주가 주로 시인하여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

 

9~11절은 높이 들린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언한다. 다음의 두 가지 반응은 예수님은 주시며 만물이 그분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 “모든 무릎이 꿇게 될 것이다(10). 무릎 꿇은 자세는 관습적으로 어떤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여기서도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경의와 그분의 최고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경의의 범위는 우주적이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란 모든 생명체, 즉 하늘의 초자연적 존재, 지상의 생명체, 그리고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을 포함한다.

경의를 표하는 행위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 심지어 멸망할 자들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할 것이다. 둘째,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11)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쟁투의 쟁점이었던 하나님의 품성이 의롭고 신실하다고 만물이 인정할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원수 사탄마저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최상권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70~671 참고).

 

<부가설명>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 역은 여호와라는 단어를 모두 로 번역하였다. 사도들은 이 번역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신약성경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이 예를 들면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구절은 로마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인용되어 있다. 이런 예는 여러 곳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주로 시인한다는 말은 바로 여호와로 시인하여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계신분이신데, 자기를 비어 사람과 같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시므로 그분이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이심을 증명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온 우주에 드러낸 것이다. 사단도 이제는 결코 참소할 아무런 조건도 없게 되었을 때에 여호와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예수님이 여호와이심과 공의롭고 사랑이신 분이심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 우주가 여호와 삼위일명(28:19)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품성이 자비롭고 또한 공의롭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며 만물이 심지어 사탄까지도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날() 우주적인 구경거리

1219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여기서 예수님은 오해 받기 쉽지만 성경이 여지없이 드러낸 한 가지 원리를 밝히셨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어떻게 그분에게 영광 또는 수치를 드릴 수 있는지 말해 준다.

 

1. 36:23~27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변호하셨는가?

[36:23~27]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구원하여 그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능히 행할 수 있게 하심으로 자신이 공의롭고 사랑이심을 드러내셨다.

 

이 말씀은 새 언약에 관한 유명한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25), 그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여하여서(26)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계명을 지킬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한다. 하나님이 성취하기 바라시는 것은 신자들을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여서 그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분의 품성과 행위를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23).

물론 온 우주 앞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가였다. “사탄은 자기의 가면이 벗겨진 것을 알았다. 그의 행적은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하늘 온 우주 앞에 공개되었다. 그는 살인자임이 판명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는 하늘 존재들의 동정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시대의 소망, 761).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고전 4:9)되었다. 즉 우리의 행동을 다른 사람뿐 아니라 하늘의 지적 존재들도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증거를 보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3:10) 할 수 있다. 아니면 우리가 섬기겠다고 고백한 주님의 이름에 수치와 모욕을 드릴 수도 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우주와 세상의 구경거리였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심으로 참 생명의 주시며 스스로 계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다.(10:17,18 참고)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모시고 영원한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을 얻으면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다.(1:4)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하면 세상의 빛이 된다. 이 빛은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를 뜻한다. 생명 없이도 착한 행실을 할 수 있다. 그렇기 위하여 인간은 수양하고 도야하며 연마한다. 그러나 빛은 빛으로 있으면 바로 밝게 비치게 된다. 그것이 빛의 성질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성질이 착한 행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치신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는 수양과 도야와 연마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받은 사람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빛을 비추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생명을 모셨는지? 그렇다면 빛을 비출 것이다. 사람들은 그 비치는 빛을 착한 행실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우주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존재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교훈 : 우주의 지적 존재들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를 통해 대쟁투의 실상을 보았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주시하고 있다.

 

 

여섯째 날()

1220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33~43 “죄가 용납된 이유”, 교회증언 5, 737~746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품성을 읽어 보라.

하늘 아버지의 완전하신 대표자이시며 당신의 품성과 실행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탄의 곡해를 논박하실 한 분이 그곳에 서 계셨다. 사탄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속성을 마치 하나님의 속성인양 비난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사탄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도 멸망 받지 않고 회개함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가 영생하기를 바라시는 동정과 자비심이 많은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보았다”(가려 뽑은 기별 1, 254).

 

하나님의 보좌에서 갈보리 십자가 제단의 비밀로 이끈 그리스도의 사명은 너무나 희미하고 어렴풋이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점점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사명의 힘과 원리를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찾게 될 것이다”(In Heavenly Place, 3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대쟁투가 막을 내릴 때, 사탄과 멸망당할 자들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지적 존재가 죄와 반역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함 그리고 의로움을 인정하리라는 생각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해하기에 버거운 개념이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줍니까? 우리는 이것을 통해 도덕적 자유의 중요성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에서 자유가 얼마나 신성하고 근본적인 것인지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해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신 분임을 확신하게 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진정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시인하는 것은 피조물들의 특권이고 그것이 자유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존재를 부인하며 그것은 단지 세상의 죄악과 고통을 설명하기위한 고대의 미신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그 같은 견해가 얼마나 심각한 기만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신약 성경도 실제적인 존재로 밝히고 있는 세력을 기독교에서 부인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교회가 근대주의와 세속주의의 침투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까?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그와 같은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의 실수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사탄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체 대쟁투의 틀에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사단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완전히 거짓을 가르치는 책이 되고 예수님의 봉사나 희생은 소설적 허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만든 기막힌 기만이며 교회가 그 기만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사탄이 교회에 교묘히 침투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오한 계시의 말씀을 확신함으로 이런 기만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