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8일 안식일


소형 수인 인쇄기와「세 천사의 기별」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 2:2).


  1848년 11월,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도체스터에서 화잇 선지자는 ‘출판’에 대한 이상을 본 후에 남편인 제임스 화잇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작은 잡지를 인쇄해서 백성들에게 보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작게 인쇄하십시오. ... 이 작은 시작에서 온 세계를 두를 빛이 나올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이 ‘특별한 이상’에 기초하여 재림교회는 초창기부터 출판물을 통한 선교의 꿈을 가지고 어느 나라에서나 선교 책자들과 잡지들을 펴내는 일을 중시했고 또 큰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 점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05년 가을, 재림 기별이 전파되기 시작한 지 불과 1년 남짓 지난 때였으나, 두 사람을 일본 미순에 파견하여 인쇄 기술을 습득하게 하고 일문 전도지를 번역․인쇄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1909년 3월, 한국 미순은 일본 미순으로부터 소형 수인 인쇄기를 받아 순안 학교의 교실 한 칸에 설치하고 인쇄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이 기계를 통하여「요한일서 연구」,「성경과정」,「성경요리연구」등의 책자들과「죄인은 구주의 힘을 의지할 것」,「예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오심」,「구원의 길」등의 전도지들을 인쇄․발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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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인쇄기를 통하여 1908년 순안 간부회의에서 결의한 잡지 발행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잡지가 바로 1910년 10월 20일 창간된 이래 현재까지 우리 민족과 고락을 함께 해 온「시조(時兆)」지의 전신인「세 천사의 기별」지였습니다. 사실 1910년 7월에 「특별한 기별」이라는 선교잡지를 창간했는데, 두 달 후인 9월에는「말세복음보」로 제호를 바꾸어 간행했습니다. 이 제호가 총독부의 규탄을 받아 또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세 천사의 기별」이라는 제호가 등장한 것이고 불가피하게 다시 창간호로 발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형 수인 인쇄기가 ‘무언의 선교사’인「세 천사의 기별」지를 쏟아내면서 “조선 사람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출판 선교 활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신문이라야「매일신보」, 잡지라야「소년」과「천도교 월보」가 있을 뿐이고, 출판물에 대한 총독부의 감시가 한층 강화되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재림교회가 제호를 거듭 바꾸면서조차 선교잡지 발행을 시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기별’과 ‘특별한 이상’에 대한 커다란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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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무언의 선교사’ 즉 세 천사의 기별이 담긴 출판물들을 우리의 손에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