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3일 일요일


공전(空前)의 호성적(好成績)


“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고 밭에서는 소출이 많이 나리라”(겔 36:30).


아마 시국의 사정과 연관이 있어서인지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우리 재림교회는 수침자 수와 안식일학교 학생 수가 이렇다 할 만큼 뚜렷하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분야만큼은 최전성기를 맞이했으니, 참으로 놀랍고 특별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판선교 분야였습니다. 1936년 8월 중순에 시조사는 일본으로부터 7,000원에 달하는 고가의 인쇄기를 사들여 시조(時兆)를 비롯한 여러 종의 잡지와 책자들을 보다 신속하고 보다 다량으로 찍어냈습니다.


1936년 9월에는 시조 발행부수가 무려 39,000부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1939년까지 매월 30,000부 이상을 발행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영린 목사가「한국 재림교회사 연구」라는 논저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실로 공전의 호성적으로서 시조사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30,000부라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시조는 1937년 1월부터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신철자법>을 채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조사는 새 활자를 준비하고 편집 체재를 바꾸는 등 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매달마다 시조가 수만 부씩 ‘표준말’로 인쇄되어 전국 각지의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고, 또한 국어의 통일과 보급에 앞장서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시기는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기 위하여 발악하던 때였으므로 시조가 우리 민족의 앞길을 밝혀주는 커다란 등불의 역할을 했으니 아무리 투자했을지라도 ‘참 잘했다’ 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시조사는 1939년 10월호 시조를 창간 30주년 기념호로 꾸몄는데 각계 인사들이 앞 다투어 시조가 우리 사회에 끼친 공을 치하했습니다. 시조를 가리켜, 독립신문 사장이었던 윤치호 선생은 “조선 사람이 잊을 수 없는 은택이다.”라고 했고, 동아일보 백관수 사장은 “정신 문화에 끼친 공적이 크다.”라고 했으며,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은 “우리 민족을 자라게 한 공로를 감사한다.”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 기념호에는 춘원 이광수 선생의 “안식교회와 나”라는 제하의 글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출판 선교사업이 신앙적이면서도 교육, 건강, 가정 등 교양적인 내용을 통하여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위로와 감화를, 비전과 변화를 줄 수 있는지 새롭게 뒤돌아보도록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주님, 시조사를 축복해 주소서. 그 선교적인 역량이 더욱 커지게 하시고 또한 더욱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소서.



k0019s.jpg


k0045s.jpg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