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츠가 믿게 되다

2월 1일 일요일 베이츠가 믿게 되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시 33:4

베이츠이 아버지는 종교적인 사람이어서 아들을 신앙적으로 기르려고 노력하였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807년, 제2차 대 신앙 각성 운동의 물결은 젊은 조셉을 깊이 흔들으나 선원이 됨으로 이 관심은 곧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작은 목선 위에서 지냈던 해양 생활은 베이츠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역할을 하였다. 후일 베이츠는 "폭풍 속에서 우리 생사는 오로지 한 조각 널판자의 두께에 달려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바로 이 널판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에게 처음으로 종교심을 유발시켰다고 베이츠는 피력하였다. 파도가 돛대 끝까지 올라가는 나흘 동안에 무서운 태풍속에서 젊은 선장은 필사적으로 두가지 일을 하였다. 곧 40톤에 철근을 바다에 버렸고, 유례없이 요리사에게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요리사만 기도한 것이 아니였다. 베이츠의 아내인 프루디도 기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이 너무 많은 소설책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프루디는 신약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서적을 남편의 짐에 싸주었다. 이 와중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곧 베이츠는 흥미 위주의 독서를 버리고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ridge)의 <영혼속에 신앙의 시작과 진행, Rise and Progress of Religion in the Soul>과 같은 서적에 심취하게 되었다. 32세의 선장은 종교적이 되었으나, 그는 동료들이 눈치채고 조롱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크리스토퍼의 장례는 성원의 죽음으로 어떤 계기가 찾아왔다. 선장으로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베이츠의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였다.

그는 최선을 다하였고, 수장 나흘 후, "나의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로 약속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쳤다.

크리스토퍼의 장례는 베이츠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어서, 이 기회에 선원들을 감동시키며, 다음 주 일요일에 영생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베이츠는 자신의 개심에 대하여 "내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값진 어마어마한 진주를" 발견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그가 언급한 것처럼, "생명과 구원의 방법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것" 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르칠 것이었다. 그러한 사명감은 그의 남은 생애를 지배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생애는 물론 우리들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희망차고 기대가 넘치는 기쁨의 2차 대 각성 가운데서 우리는 목회에 재능이 없어 보이는 후보자를 발견한다.

사실상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년생)는 20대에 목사를 닮는 일보다는 흉보는 일에 더 치중했던 사람이었다. 특히, 자기 가족 출신 목사들을 표적으로 삼아 그런 놀이를 하였다. 그런 못된 짓의 대상에 포함된 사람들은 그의 조부인 펠프스(Phelps, 침례교 목사)와 그의 삼촌인 로우 햄프톤 침례교회의 엘리후(Elihu) 밀러였다. 

조부와 삼촌의 설교의 특징을 흉내 내는 것이 믿음 없는 그의 동무들에게 무척 큰 여흥거리를 제공하였다. 그의 친족의 "말과, 억양, 몸짓, 열정, 친족들이 밀러를 향해 나타내는 슬픔"까지도 "우스꽝스러운 심각함"으로 흉내 내었다.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넘어서, 그런 장남은 젊은 밀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신속히 문화가 바뀌는 시대에 사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밀러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그의 친족에 대한 반향도 그들의 부모와는 다른 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수년간에 걸친 청소년기의 투쟁의 일부였다. 

불행히도 그 투쟁은 부모들과 청소년들에게 공히 힘든 과정이었다. 매우 신앙적인 밀러의 어머니에게는 참으로 그러하였는데, 아들의 못된 행실이 결코 재미나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자의 행동은 "죽음의 쓴맛"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은 늘 그렇게 종교를 반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는 고통스러우리 만큼 신실하였다. 그가 10대에 쓰기 시작한 일기의 첫 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일찍이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일기장을 시작하면서 자신에 관한 유일한 묘사를 그렇게 남긴 것으로 짐작하건대 자신의 특성으로 그 점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하였다. 장년이 되면서 그는 기독교를 떠났고, 공격적이고 의심 많은 이신론자가 되었으며, 그의조부 뿐만 아니라 기독교까지 비웃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연로한 조부 펠프스는 결고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윌리엄의 어머니에게 "윌리엄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이 있을 것이다."고 위로하였다.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 말이 성취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이었다. 

펠프스는 자기의 자녀들이 손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바로 여기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점이 있다.  

내일을 위하여 넉넉하게 소유하지 못할지라도 낙담하지 말라. 그대는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편 37편 3절)라는 그분의 약속의 보증을 가지고 있다(보훈,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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