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4 (목)

2008년 12월 4일 목요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아빠, 사랑해요. 그것은 하워드가 들은 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는 왜 그런 말로 통화를 끝냈을까? 자기가 막 타려던 버스가 폭발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의 딸이 그렇게 죽기 전 그가 먼저 죽어야 순서가 맞는 것 아닌가? 하워드는 슬픔 가운데 혼자라고 느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했다(고전 10:13 참조). 그러나 하워드는 더 이상 확신이 없었다. 가슴이 무거워 때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러나 그 약속이 하워드에게는 성취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 구절을 읽었지만 위로를 받지 못하였다. 고통 가운데 상실감이 그를 계속 짓눌렀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였다. ‘나는 마리아가 십자가에 있는 그녀의 아들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궁금하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그녀가 느낀 어떤 감정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코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요?” 하고 소리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이 죽을 것을 알았을까? 그녀는 그것을 어떤 우주 계획의 일부로 알았을까? 왜 그녀는 달려가서 대신 죽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봄이 되어 장미가 피기 시작하자 그는 딸과 함께 그 나무를 심었던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비가 오자 다시 우울해졌다. 그는 “나는 그 비극적인 통화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요한계시록 21장 4절을 읽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구절은 미래에 관한 말씀이었다. 그가 그토록 듣기를 갈망했던 말씀. 또한 하워드는 그 말씀이 마태복음 5장 4절을 설명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통하는 자들이 이 세상 삶에서 늘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니다.

미래 시제는 이 세상과 현재에 항상 적용되는 약속은 아니다.

그러나 위의 두 성경절 모두 이 점에서는 확실하다. 하워드는 딸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영원한 삶을 믿었기에 소망에 관한 요한계시록의 말씀 안에서 점차 위로를 찾아갔다. 비록 그의 딸이 무덤에 누워 있지만, 그분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애통하는 자들은 영원히 위로를 받을 것이다.

주님, 저는 응답되지 않은 기도, 막지 못하는 비극 그리고 제가 잃어버린 사랑하는 이들 때문에 자주 좌절감을 느낍니다. 저를 도우셔서 주님의 미래의 약속을 신뢰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미미하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원칙, 곧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항상 흘러나오는 살아 있는 샘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 거하면 우리는 이웃에게 증오심을 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게 될 것이다(보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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