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보니 다른 짐승이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 도처의 일요일 핍박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5:10


1880
년대는 일요일 법제화와 함께 박해의 힘과 규모가 확대된 시기였다. 문제는 1882년 캘리포니아에서 주 선거 때, 일요일 현안이 주요 문제로 등장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재림신자들이 타격을 받은 것은 태평양 인쇄소를 일요일에 가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윌리 C. 화잇이 지방 경찰에 체포된 사건 때문이었다.


비록 캘리포니아는 잠시 후 일요일 법률을 폐기하였지만, 유사 법안이 전국적으로 고개를 듦에 따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들은 궐기하여 행동에 나섰다. 아마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일요일 법제화 반대 투쟁의 선봉을 삼기 위해 1884년에 <아메리칸 센티널 오브 릴리저스 리버티, American Sentinel of Religious Liberty>를 창간한 것이다. 현재는 그냥 <리버티>로 불린다.


1885
년에는 투쟁의 중심이 아칸소로 옮겨졌다. 1885년부터 1877년까지 아칸소 주에서는 일요일 모독과 관련된 사건이 21건이나 발생하였다. 두 건을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가 안식일 준수자들이 입건된 것이다. 법원은 그 두 건의 피의자들을 보석금 없이 석방하고 사건을 기각해 버렸다. 그러나 재림신자들에게는 일인당 보석금이 110달러 내지 500달러나 되었다. 당시 노동자 하루 임금이 1달러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이것은 엄청난 벌금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 A. T. 존즈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다수가 믿는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아무 죄도 없는 일부 시민들에게 종교적 멸시를 퍼붓는 수단으로 법률이 이보다 더 분명하게 이용된 사례는 다시 없을 것이다.”


1885
년 후반에는 테네시가 일요일법의 쟁점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걸쳐 그 지역에서 다수의 재림신도들이 체포되었다. 목사들을 포함한 일부는 일반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한 줄의 사슬에 매여 옥외 노동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1888
년에는 가톨릭 주교인 제임스 기본스가 개신교도들과 손을 잡고 미합중국 의회에 국가적 일요일 법률의 제정을 호소하는 서명 운동에 가담하자 재림신도들의 말세적 흥분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개신교인들은 그런 협조를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크리스천 스테이츠먼, Christian Statesman> 지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들[로만 가톨릭]이 정치적 무신론의 확산을 반대하는 운동에 협조하기를 기뻐할 때, 우리는 언제든지 그들과 반가이 손을 잡을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고귀한 선물이다. 우리에게 아직 종교의 자유가 있는 동안 우리는 이를 귀하게 여기며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씨가 싹이 트도록 하시고 자랄 힘을 주시며 밤낮없이 돌보시는 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늘의 왕이시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더욱 크신 보호와 관심을 가지고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신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씨를 뿌리나 거룩한 파종자께서는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심령 속에 씨를 뿌리신다(COL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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