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6일 일요일


초창기 선교사들의 열정과 희생정신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빌 3:10, 공동번역).


1905년 11월에 스미스 목사가 그의 가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많은 선교사들이 뒤이어 왔습니다.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수고와 헌신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초창기 역사는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알알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스미스 목사는 1906년 11월에 순안에서 딸 윌리나(Willena)를, 1911년 11월에 원산에서 아들 지쓰로(Jethro)를 전염병으로 잃어야 했습니다. 러셀((R.Russell, 노설) 의사는 다섯 살된 아들을 잃고 석박산 기슭에 무덤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순안 의명학교의 교장이었던 리(H.M.Lee, 이희만) 선교사 역시 네 살 박이 큰 딸이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또한 클로우스(J.C.Klose, 구치흔) 선교사도 한 자녀를 눈물을 감추며 우리의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왕거린(R.C.Wangerin, 왕아시) 선교사는 1909년 10월에 내한하여 1911년 8월부터 남선지방의 선교 책임자로 크게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질병을 얻어 치료를 받고자 1916년 7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만 1917년 6월에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처형은 23세의 나이로 1907년 1월에 내한한 샤펜버그(M.Schaffenburg, 사엄태) 선교사였습니다. 그녀는 교사로, 각부 주임으로, 편집인으로 큰 일들을 맡아 비상한 정력으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1919년 12월 19일 향년 36세의 나이에 애석하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투병 중에서도「고대사화」(부조와 선지자)를 번역하여 우리의 손에 들려주기까지 했는데, 그녀가 무섭게 일을 좋아하던 것을 아는 이들마다 부음을 접하고 참으로 가슴아파했습니다. 1920년 1월호「교회지남」에는 “사랑하는 우리의 누님 ... 조선을 위하여 ... 그렇듯 사랑하여 막대한 근면과 고심으로 행하던 일, 심한 병을 얻은 후에도 힘쓰던 일에서 떠났으니 ... 지금 잠든 누님의 훌륭한 모본을 힘써 따르기를 포고하노라.”는 조선합회 평위원회의 추모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들 초창기 선교사들이 미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하여 목숨조차 아끼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눈”정신은 후배 선교사들에게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고맙고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 한국 재림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희생을 허락하신 것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 정신으로 선교사업에 매진하게 하소서.


아래사진을 클릭하시면 한국 재림교회 초창기 선교사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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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재림교회 초창기 선교사들>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