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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화요일 - 축복인가 행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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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2, 3).

마태복음 5~7장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를 듣습니다. 산상 수훈은 우리가 팔복으로 알고 있는 여덟 개의 교훈으로 시작합니다. 각 교훈은 ‘복이 있다.’ 혹은 ‘행복하다.’ 등 여러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단어 마카리오스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행복하다.’로 번역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를 믿고 있음에도 가끔 행복하지 않은 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이미 하나님 왕국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행복하며 또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는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 왕국의 시민들에게도 감정이 우울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속상한 날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앞 문장에서 제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핵심 단어는 ‘감정’입니다. 대부분은 행복을 어떤 주관적인 상태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느끼거나 슬프게 느끼는 것입니다. 즉 행복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하다.’라는 말은 ‘마카리오스’의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관적인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은 어떤 젊은 학생이 제 연구실로 찾아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행복하지 않게 느끼는 그의 감정이 그를 심각한 영적 좌절로 이끌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자기가 행복을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의 삶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그는 결국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그가 모든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나 슬픔처럼 주관적인 감정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분의 희생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아 하늘의 왕국의 시민이 되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학생이 어떻게 느끼든지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을 기쁘게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저는 예수님을 통해 복을 받았음으로 여전히 화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심령의 화평에 대해 행복을 느낄 수도 있지만, 복을 받는 것은 행복을 느끼는 것 이상의 일입니다. 복을 얻었다는 것, 이것은 우울한 날 따위가 나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실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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