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11 (목)

2008년 12월 11일 목요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계 21:15~18).

성경은 마치 거대한 원과 같다. 시작은 아름답고 안전하며, 또 무사한 곳이었지만(창 1:2), 마침내 죄, 의심, 불순종이 들어왔으며(창 3장), 죄와 불순종의 이야기가 3장 초부터(창 3장) 요한계시록 20장 끝까지(계 20장) 계속된다. 새 예루살렘의 이야기는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이(계 21장) 다시 평화롭고 무사하고 안전하였던 시작 당시처럼 될 것을 묘사하고 있다. 성경 말씀은 요한계시록 없이는 완전한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며, 요한계시록 역시 중요한 마지막 두 장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새 예루살렘이 지금처럼 문자적 도성일까? 아니면 형용하기 어려운 진짜 도성의 상징일까? 그것이 만일 고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영화로운 미래의 그림이라면 실지보다는 상징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은 장래의 설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독자의 의문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셔서 생애가 바뀌기를 의도하셨다.

경외서 토빗의 예를 들자면, 마지막 때의 예루살렘은 그 문이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로 만들어졌고, 그 벽과 거리는 보석이 박혀 있다고 묘사하였다(두웨이 역 토빗 13:21, 22, 칠십인역 13:17).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토빗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 문구 중 하나일 뿐이다(두웨이 역 토빗 13:1). 이사야 역시 사파이어 기초석, 보석으로 꾸며진 문, 빛나는 보석들로 만들어진 벽들을 예상하고 있지만(사 54:11, 12), 이것 역시 찬양을 위한 것이다(이사야 60:10~18, 특히 18절). 스가랴는 또 말하기를 예루살렘에는 벽들이 없을 터인데, 주님 자신이 불 담이 되어 둘러쳐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슥 2:4, 5 참조). 이 모든 묘사가 문자적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

이 이상이 의심 많은 세대에 사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상징들은 저자의 생존할 당시와 장소에 주어졌지만, 중심 주제만은 명백하다. 인간이 바라고 꿈꾸던 모든 것이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바로 지금 시작되고 있다. 미래의 새 예루살렘의 이상은 우리의 마음과 심령을 좀 더 중요한 곳으로 초점을 맞추게 한다.

주님, 저를 도우셔서 우리의 낙원이 캐리비안 섬이 아니며, 이상적 도시가 할리우드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제 일생 최대의 꿈과 희망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찾게 하십시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친히 좋다고 선포하신 것은 인류를 위한 최상의 축복과 향상의 법칙이었다(보훈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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