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 두 종류의 의(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1


믿음과 순종의 관계는 의와 칭의의 중심이다. 어제 우리는 유라이어 스미스가 1888년 초에 순종이 구원의 열쇠라고 주장했음을 발견하였다. 그의 중요한 예증은 젊은 부자 법관이었다. 그러나 스미스가 주지하지 못했던 것은 젊은 부자 법관이 계명들을 준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바된 채로 그리스도를 떠났다는 것이다.


물론, 스미스와 그의 동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믿었다. 그들은 이것이 성경에 있으므로 믿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흠정역 로마서 3 25절의 잘못된 번역에 기초하여 이해하였다. 이 번역은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한다. 그래서 J. F. 발렌저(Ballenger)과거의 죄를 갚기 위하여는 믿음이 전부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고 과거의 기록을 정결하게 하는 보혈은 참으로 귀하다. 믿음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의무는 우리가 행해야 한다.…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라고 기록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과거의 죄를 처리하는 것이라고 믿음으로 스미스와 버틀러, 그 동료들은 개심 후의 칭의는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식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후에 발렌저는 야고보서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를 인용하며우리가 순종할 때, 그 행위가 우리의 믿음과 함께 칭의를 얻게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재림교인들에게 칭의는 바울이 반복하여 단언한 것처럼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고, (아브리함의 칭의마저도. 3:20-25, 4:1-5, 2:5,8, 2:16 참조) 믿음을 더하는 행위였다.


정확하게 왜고너와 존즈는 이 신학을 동의하지 않았다. 1888 1월자 <시조> 지의의의 다른 종류들이란 제목의 논설에서 왜고너는 스미스와 겨루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그들 스스로의 행위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의에 굴복하지 않았으므로아무도 그들의 도덕적 의를 개선할 수 없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사실, 그들의 의는참된 의가 아니다.”라고 단언하였다. 그들은 단순히더럽고 헤어진 옷 위에 더 더러운 걸레를 입음으로 가려 보려고노력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리고 행위는 이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바로 그것이 미네아폴리스의 쟁점의 본질이었다. 이것은 또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과 그의 상대들과의 싸움이었다.

 

아버지, 우리가 매일 이것을 생각할 때, 이 중요한 주제를 이해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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