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2 안식일


‘믿음 운동’의 결실 - 경성요양병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k0059s.jpg 
류제한(George H. Rue M. D)

  1931년 3월 원동지회 춘기 평의원회에서 경성에 요양병원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러한 결의를 받아 다음 달인 4월에 조선합회 평의원회는 유제한(G.H.Rue) 박사를 순안에서 서울로 이주케 하여 병원을 개원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는 세계적인 불경기여서 지회로부터 아무런 재정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소공동에서, 그 후에는 인사동과 낙원동에서 세를 얻어 소규모 병원을 개설하고 환자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1932년 8월에「마닐라요양병원」과 홀이라는 의사에게서 경성요양병원 건립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1,000원을 기부 받았고, 또한 1932년도 수확운동을 통하여 3,800원 94전을 확보했습니다. 이 자금이 기초가 되어 1933년 3월 22일에 청량리 전차 정류장에서 4리쯤 떨어진 곳에 12,000평의 요양병원 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현 삼육서울병원(서울위생병원) 자리입니다. 

  조선합회 평의원회는 1934년 8월 21일에「대정콘크리트회사」와 41,000원에 경성요양병원 건축 청부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 현금이 불과 16,415원 77전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될 줄로 확신”하고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머갠(S.S.Magan) 부인이라는 분이 고인이 된 남편을 기리기 위하여 17,300원을 기부하는 등 기이한 방법으로 자금이 생겨나서 건축이 속속 진행되었습니다. 심지어 난방 장치와 연관(鉛管) 설비를 위하여 12,500원이 추가로 들어가야 하고 그 외에도 실내를 장식하고 비품과 의료 기구들을 구입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자금이 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성도들이 거듭 헌신하고, 대총회와 지회 역시 13째 안식일 헌금을 비롯하여 다양하게 재정을 마련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어서 마침내 40병상 규모의 병원 건축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1936년 6월 15일 오후 4시에 신축 병원 옥상에서 200여명의 내외국인 인사들이 열석한 가운데 감격스러운 낙성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낙성식에서 유 박사는 “여러 해 전에 믿음으로 시작한 것이 결국은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경성요양병원의 건립 과정은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 운동’은 한국 재림교인들에게 커다란 영적 성숙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주님, 능치 못할 게 없으신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 믿음 더욱 견고케 하시고 더욱 큰 일 이루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k0058.jpg
인사동의 경성요양의원 시절의 직원 일동(1933년경)

k0060s.jpg
1936년에 준공된 경성요양병원

 


k0008s.jpg

k0009s.jpg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