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일 월요일

숨 가쁘던 50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8월 10일부터 9월 30일까지! 불과 50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이루어진 활동은 마치「사도행전」이 전하고 있는 기독교 초기의 활동과 같이 숨 가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구니야 히데가 ‘마게도냐의 부르짖음’에 응하여 1904년 8월 10일 진남포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임기반, 강창오 등과 함께 다섯 주일 동안 열여섯 마을을 다니며「세 천사의 기별」을 힘써 증거했습니다. 그가 한자로 석판에 쓰면 임기반이 우리말로 풀어 설명했는데,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강창오가 일본말로 물어서 보충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곳곳의 집회마다 ‘다른’ 민족, ‘다른’ 언어를 초월케 하시는 ‘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으며 믿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49명이 침례를 받고 재림교회에 입교했습니다.


9월 13일에는 일본 미순장인 필드 목사가 우리나라의 서북지방에 번지기 시작한 놀라운 영적 불길을 보기 위하여 직접 왔습니다. 그는 17일 동안 머물며 구니야 전도사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두 사람이 9월 30일에 진남포를 떠날 때는 수침자가 71명, 안식일 준수자가 150명가량이나 되었습니다. 그때에 필드는 특히 네 곳을 찾아 교회 조직을 직접 이끌었는데 선돌, 강대모루, 용동, 바매기교회였습니다.

초창기+진남포교회.jpg


이 가운데 첫 번째로 교회조직이 이루어진 곳은 선돌이었습니다. 그날은 9월 17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재림교회가 생겨난 날이었습니다. 총 교인 수는 32명이었으며, 그 중 25명은 침례 교인이고 7명은 침례 후보자였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선돌 감리교회 신자들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절반도 더 되는 수였고, 또한 주축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교회당의 건축자금을 거의 다 감당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재림교회에 그 교회당까지 가져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필드의 간곡한 권유도 있고 그리스도인 덕목도 아니었기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진남포첫총회.jpg


그들은 교회당을 새로이 건축하기로 작정하고 매일 밤 자기 전에 짚신 한 켤레씩 만들어 헌납하기로 했습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300원이 하나님 앞에 드려졌고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희생정신 위에 첫 교회가 세워진 것은 참으로 뜻 깊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그때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마구 뜁니다. 어느 때보다 지금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이 우리의 전도 현장 곳곳에 너무도 절실하오니 부디 허락하소서.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