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7일 금요일

 

40원, 4년 그리고 20,000명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렘 30:17).

“호열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 또 이질이 유행하였(다). ... 2백 내지 3백 호나 되는 부락에 장티푸스로 인하여 전부 감염되었는데 4할 이상이나 사망하였다. ... (선페스트) 병은 감염되는 대로 백이면 백 사람이 다 죽었고 예방 접종을 하였을지라도 50퍼센트는 사망했다.” 이 내용은 우리나라에 와서 약 15년 간 의료선교 활동을 펼쳤던 러셀이 남긴 회고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기층민이 가난과 무지 그리고 질병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었기에 1884년에 고종 황제가 교회 건립이나 복음 전도는 금했지만 의료 및 교육 활동만큼은 허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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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선교사인 스미스 목사의 사모가 간호사여서 선교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환자들을 도와주고 집에까지 데려다가 치료했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딸 윌리나조차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우리 민족에게 우선적으로 의료 활동이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대총회에 의료선교사를 요청했습니다. 이때에 젊은 의사인 러셀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나라를 선택하고 1908년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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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안역에 도착하자마자 환자들부터 만나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15명가량의 환자들이 역까지 나와 그를 간절하게 기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러셀 부부는 스미스의 집에서 방 한 칸을 쓰며 살림도 하고 환자도 받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안 학교의 교실을 한 칸 빌려 병원으로 활용했습니다. 1909년 9월에 샤펜버그 선교사가 서울로 가게 되자 러셀은 즉시 그녀가 살던 초가집을 40원(20불)에 사서 병원을 이전하고 보다 확대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40원 짜리 병원에서 4년 동안 무려 20,000명의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워싱턴 포스트」지에 실려 미국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20불 짜리 집에서 20,000명 환자」였습니다. 정말 진정어린 그리고 눈부신 활동이었습니다.

특히 러셀은 수많은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면서 세 천사의 기별이 담긴 전도지를 매 환자의 손에 들려주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에게 의료선교사업은 영원한 복음의 오른팔이었습니다. 이러한 선교적인 목적이 우리 재림교회가 오늘날까지도 의료사업을 전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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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우리 민족의 질고와 아픔을 위로하시고 치유와 구원의 은혜까지 입혀주시는 것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의 의료선교사업을 크게 축복하소서.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