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9일 일요일


원산 - 동북지방 개척 교두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1909년 후반기에 재림교회의 선교지도(宣敎地圖)에서 두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전시열 목사의 주도 아래 선교본부가 서울로 이전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스미스 목사 가족이 동북지방 개척을 위하여 원산으로 이전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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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 목사 가족

  스미스는 초대 선교사였으나 새로운 지방 선교를 위해서도 초대 개척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철도나 도로가 아직 개통되지 않아서 원산까지 가는 길은 불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가족과 함께 기차로 부산에 갔으며, 거기서 또 배를 타고 무려 36시간이나 걸려 원산까지 갔습니다.

  그의 가족은 1909년 11월에 도착하여 오두막집에서 겨울 추위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스미스는 곧바로 집집을 방문하며 영혼을 얻기 위하여 그야말로 투혼(鬪魂)했습니다. 그 결과 최태현과 김석국이라는 이들을 얻었습니다. 그들 중에 최태현은 침례교회 전도사로 안변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전도를 받고 세 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였습니다. 훗날 우리 재림교회의 지도자로서 크게 활약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교한 바로 그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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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현>

  스미스는 1910년 2월에 전도회를 2주일간 개최하고 15명의 영혼을 더 얻었습니다. 이리하여 정식으로 안식일학교가 조직되었고 원산은 동북지방 개척을 위한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수고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많은 영혼이 재림 기별을 받아들였고 이원, 안변, 함흥, 북청 등 동북지방 곳곳에 재림교회가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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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교회 1929. 12.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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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선대회 선교 강습회 기념 1937. 6.>

 1911년 7월에 두 살 반 된 어린 아들을 질병으로 잃기까지 했으나 그 부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과거 시조사 편집국장이었던 유영순 목사는「회고록」에서 "그는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적인 정신이 투철한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반드시 그를 위해 큰 상을 준비해 주셨으리라 믿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동북지방은 누가 보아도 선교 우선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미스 목사로 하여금 아무도 가지 않은 험한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자기 백성'을 많이 두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뚝심 있는 개척 전도자를 찾으십니다. 

  주님, 오늘날도 영혼을 추수해야 할 곳이 여기저기 널려 있습니다. 오, 참으로 추수할 일꾼들을 곳곳에 더 많이 세워 주소서.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