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는

2009년 9월 15일 화요일 - 두 종류의 의(3)

 


우리의 의는[의로운 행위들은개혁 표준 성경] 다 더러운 옷 같으며…  64:6

과연 그런가?

이것이 스미스와 그의 동료들의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강조에 대한 왜고너의 입장이었다. “인간의 의는 그가 의롭게 된 후에도 그 전과 같이 가치가 없다.”라고 왜고너는 기록하였다. 의로워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많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가장 똑바른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의 주님’”이시므로 그것은 사실이다. 왜고너에게 있어 믿음이 전부였고 믿음 더하기 행위는 의라는 공식은 적그리스도의 정신에 그 근거를 둔 것이었다.


존즈는 왜고너와 함께 견고하게 섰다. 예를 들어, 1889 5월에 그는 그의 청중들에게 율법은 의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스미스는 이와 같은 주석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한 달 후 스미스는 <리뷰> 지의우리의 의라는 기사를 통하여 존즈에게 전면 사격을 가하였다. 그는 <리뷰> 지의 어떤 필자들이 우리의 의를더러운 옷이라고 말하므로 율법을 폐하는 자들의 손에서 놀아난다고 언급하였다. <리뷰> 지의 편집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완전한 의를 계발하며,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대속자의 손에 있는 관성의 물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자에서 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법과 조화를 이룸에서부터 온다이런 상황에서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이 아니다.” “계명들을 행하고 가르침으로 얻게 되는 의가 있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기사가 나왔을 때, 엘렌 화잇은 뉴욕 주 롬(Rome)의 야영회에서 믿음은 행위 전에 와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가 말하는 것과 스미스의 기사를 조화시키지 못할 때, 엘렌은, 스미스 형제는자기가 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나무로 본다.”고 반응하였다. 그녀는 예수와 그의 의가 구원의 중심이라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지적하였다(원고 5, 1889). 엘렌은 스미스에게 그는 절벽으로 가는 길에 있으며, 그가 마치
소경처럼 걷고 있다.”고 편지하였다(편지 55, 1889).


우리의 영적 시야는 어떠한가? 우리는 믿음과 행위,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한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1888년의 강조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재림교단의 이 부분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갈 때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참된 고등 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순종함으로 얻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두고 사람을 하나님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서적을 선택할 때에는 그 얻은바 교육은 교육의 왜곡인 것이 된다(COL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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