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19 (수)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5, 16).

“맹렬한 진노”라는 구는 거의 번역이 안 된다. 문자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격노의 포도주 틀을 밟다.’이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격노’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화나셨다.’는 뜻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

요한계시록은 ‘성냄’에 관한 단어들을 모두 보여 준다. 헬라어는 ‘화’, ‘성난’, ‘격노’, ‘격분’ 등을 뜻하는 단어들이 있다. 우리는 ‘용이 분 내어’(계 12:12, 17)라는 말이나 ‘저 음녀 바벨론이 진노의 포도주로 가득 찼다’(계 14:8; 18:3)는 말 등에 놀라지 않는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악역은 자기 성질을 자제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 책에서 하나님이 자주 화나고, 격분하고, 격노하는 분으로 묘사(계 11:18; 14:10 참조)되는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접하게 될 때, 하나님의 진노가 남김 없이 부어질 것이라고 말한다(계 15:1). 그래서 요한계시록 19장쯤 오면 하나님께 문젯거리가 될 것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이 말을 올바로 다루려면 구약의 하나님이 성난, 혹은 격분하신 분으로 묘사된 면들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과 구약의 하나님은 신성의 모순되는 양면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이러한 착각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린양 역시 노하시고(계 6:16, 17),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고난 받는 곳에서 이를 승인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계 14:10). 분노는 환경과 동기에 따라서 건전한 것일 수도 불건전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열쇠는 하나님의 진노가 감정적인 것이 아닌 심판에 관한 것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은 씩씩거리며 공격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진노는 우주의 행복과 평온을 깨뜨리는 것을 결코 승인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한 자의 방어자이시며, 눌린 자의 구원자이시다. 우리는 이 단어를 우리의 비뚤어진 감정을 바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몇 십 년 전 뉴저지에서 받았던 속도 위반 티켓이 생각난다. 교통 위반으로 받은 종이에 ‘뉴저지 주민 전체가 존 폴린을 대항하여’라고 쓰여 있었다. 아니 내가 거절당했다는 말인가! 정말 뼈아픈 느낌이었다. 그 말은 주민 860만 명이 나를 대항하여 화를 내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 경찰을 포함한 그 누구도 나에게 정말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뉴저지를 지탱하기 위한 조그만 사회 규정을 어겼을 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뉴저지의 ‘분노’는 내게 좋은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주님, 부당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와 함께 계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도우셔서 모든 것을 바르게 고치실 분이라는 것을 믿게 하십시오.

그대는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산에서 본 일이 있는가? 그 아래 평지에는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 줄 믿음과 기도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보훈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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