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개론   이 서론부에서는 사무엘 상·하를 함께 다룬다. 이 두 책은 전체적으로 같은 책의 각 부분이기 때문이다.

 1. 표제
  오늘날 사무엘상·하로 알려져 있는 두 책은 1517년 이전에 있었던 모든 히브리어 문서에는 한권으로 나타나 있다. 그 책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것은 B.C. 3세기경에 있었던 구약 성경의 헬라어 역에서였다. 70인역에서 이 두 부분은 “첫번째 왕국들”, “두번째 왕국들”이라고 나타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열왕기 상·하로 알고 있는 책은 “세번째 왕국”,”네번째 왕국들”이라고 나타나 있다. “왕국들” 대신에 “왕들”이라는 제목을 최초로 붙인 것은 4세기로 추정되는 제롬의 라틴어 불가타Vulgate) 역에서였다. 그리스도 이후 수세기가 지났을 때 마소라 학자들은 사무엘상의 내용이 히브리어 본문에서 제일 가운데 위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사실 히브리어 성경은 A.D. 1517년 베니스에서 다니엘 봄버그에 의한 판이 인쇄되기까지 원래의 순서를 보존하고 있다.
 그 원래의 형태에서는 사무엘의 생애와 봉사가 책 전반부의 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거기에 붙여지게 되었다. 마지막 사사로서의 그의 중요한 역할,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인 선지자 학교의 창건자,그리고 히브리 왕국의 설립과 그것이 행하여야 할(삼상 10:25) 근본적인 원칙들을 형성한 자로서의 그를 볼때, 이 제목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사무엘이란 이름은 저작권보다는 내용을 가르키는 것이다.

 2. 저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특별히 언급되어 있는 오경과 비교해 볼 때, 사무엘의 책들은 저자나 저자일 것으로 보이는 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사무엘상의 처음 24장은 사무엘이 기록했고, 사무엘상의 나머지 부분과 사무엘하는 나단과 갓(대상 29:29)이 기록했다고 한다. 이 책이 나뉘어질 때(히브리어 본문과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 비록 그의 이름이 두번째 부분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이름인 사무엘이 두부분 모두에 적용되었다. 사무엘의 죽음이 사무엘상에서 기록되어 있고, 그의 이름은 사무엘상에서 사무엘의 책중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다 윗이 두번째 부분에서 매우 현저하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사무엘하의 제목으로 다윗의 이름이 더 적당할지 모른다. 사무엘이 그의 이름이 관계된 모든 것을 썼다는 탈무드의 진술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무엘하의 모든 부분이(사무엘상의 후반부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성서 학자들은 사무엘상 27:6을 사무엘의 책이 분열 왕국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만약 사무엘서의 두 부분이 다른 시대에 다른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왜 그것들이 원래는 하나로 출판되었는가?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한 저자의 연속적인 작업을 나타낸다면, 그는 사울의 죽음과(삼하 21:1-14) 다윗의 죽음을(삼하 23:1) 연속적으로 기록하였음이 틀림없다. 사무엘상·하의 복합 저서를 나타내며, 그것들은 각각이 본질적으로 완전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고 보인다. 각 저자는 영감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모든 부분은 결국 성령의 인도 아래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서 모아지게 되었다.

 3. 역사적 배경
  사무엘상은 사무엘의 마지막 사사정치와 사울의 최초의 왕정을 포함하고 있는 사사 시대로부터 이스라엘 통일 왕국 시대로 옮겨가는 기간에 해당되는 것을 취급하고 있다. 사무엘하는 오직 다윗의 통치만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사무엘상은 B.C. 1100년경부터 B.C. 1011년까지 거의 1세기에 걸친 것이고, 사무엘하는 B.C. 1011년부터 B.C. 971년까지 40년에 걸친 것이다.
 B.C. 1200년부터 B.C. 900년까지의 기간은 국가적인 불안과 정치적인 투쟁의 시기였다. 고대 세계 전체를 통해, 당시의 사건에 대한 설명들을 기록하거나 보존하려는 계속된 노력이 전혀 없었다. 헤로도투스(Herodotus),베로수스(Berosus), 요세푸스(Josephus), 그리고 후대에 유세비우스(Eusebius)같은 고대 역사가들은 이 시대 동안에 세계에 발생한 사건들을 위해서는 민간 전승 자료에 방대하게 의존할 필요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진술들은 현대의 고고학적 사실들에 의해 검토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크게 유용하지는 않으나 고려할 만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료가 사무엘상·하의 사건들이 발생한 기간에 대한 지식의 창고를 증가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 불안, 혼란 그리고 과도기의 기간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고대 동방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친 해양 민족의 이주와 함께 시작하였다. 제20왕조의 사제(司祭) 왕들과 21왕조의 세속 통치자들이 애굽을 다스린 사무엘상·하의 전 기간을 통하여 그들의 통치는 연약함과 국가적인 쇠퇴기와 분산(分散)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거의 모든 이 기간 동안, 앗시리아도 극도로 연약해 있었다. 바벨론에서도 내부적인 연약함과 외부의 침입으로 상황은 애굽과 앗시리아에서와 똑같았다. 그러므로 애굽과 시리아의  정치적인 영향은 팔레스타인에서 사라졌다. 해양 민족과 아람민족의 이주는 내적 불안을 가중시켰고, 고대 동방의 전 지역에 2세기란 기간 동안 국제적인 정치 상황을 혼란 속에 계속 빠뜨리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초기 왕들은 남북에 걸쳐있는, 전에는 강했던 이웃 나라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약속의 땅과 근방의 지역에 대한 그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비교적 자유로왔던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적들은 블레셋, 아말렉, 에돔, 미디안, 그리고 암몬 족속같은 팔레스타인의 지방 민족들이었다. 이웃 지파들의 저항은 점차로 극복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침내 다윗과 솔로몬은 전에 애굽 제국과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에 속해 있던 방대한 지역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 여러 지파 모두는 레위 지파에게 도시들을 분할해 줄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명령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사실 그들은 가나안 족속까지 몰아내었으나, 그들 중에 거하였다(삿 1:21, 27, 29-33). 몇년 후에 어떤 특별한 지파 할당을 받지못한 레위 족속은 생계가 곤란하게 되었다. 심지어 모세의 손자 요나단마저도(삿 18:30) “거할 곳을 찾고자”(삿 17:8) 에브라임 미가의 집을 방문하였고, 미가의 “신당”(삿 17:5)의 제사장이 되었다. 결국 그는 미가의 집에서 형상을 훔쳐냈고, 이주하는 단 족속과 함께 그들의 제사장이 되고자 따라갔다(삿 18장 참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들의 눈에 좋은대로 행하던” 때에 이스라엘은 레위 족속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백성들을 교훈해야 했던 하나님의 계획을 어겼고, 그래서 곧 그들 주위에 있는 이방의 무지하고 미신적인 길에 빠져 들어갔다. 사사 시대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이웃 나라들의 종이 되게 허락하심으로 여섯번이나 그들의 길의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종살이로부터 구해 줄 때마다 곧 그들은 무관심과 우상 숭배로 빠져 들어갔다.
 그와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사무엘은 그 당시의 악을 거절하고 그의 생애를 이러한 경향을 바로잡는데 바칠 것을 선택하였다. 이것을 성취하려는 그의 계획은 소위 “선지자 학교”를 설립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것들 중 하나는 그의 조상의 집이 있던 라마에 있었고(삼상 19:19-24) 나머지들은 후에 길갈(왕하 4:38), 벧엘(왕하 2:3), 그리고 여리고(왕하 2:15-22)에 설립되었다. 여기서 젊은이들이 읽기, 쓰기, 음악, 법률, 그리고 거룩한 역사의 원칙들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여러 가지 직종에 종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자급자족하기를 배웠을 것이다. “선지자 학교”라는 표현이 구약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그와같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지자의 생도들”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를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 바쳤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왕의 고문으로 종사하였다.
 그의 생애의 말기에 사무엘은 원치않는 왕정 설립의 대리자로 불리움을 받았다. 그의 백성과 의논한 후에 그는 “왕국의 제도”들을 책에 기록하여, 그것을 여호와 앞에 두었다(삼상 10:25). 아마도 이것은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고 생각되는 사울에게는 무가치한 것이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확신을 가지고 사울을 격려하였다.
 그러 나 그는 곧 사무엘의 영감받은 권고를 거절하고서 그 자신을 강한 호위병으로 둘렀고, 곧 자신을 절대 군주로 만들었다. 사울이 거절함에 따라 사무엘은 자신을 율법보다 높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골라 훈련시킬 것을 명령받았다(삼상 13:14). 그리스도처럼 다윗도 질투와 시기를 당하면서 단련을 받았다. 비록 다윗이 때때로 그가 숭앙하고 주창했던 율법을 범하기는 했어도 그는 항상 그의 마음을 거룩한 율법 앞에 겸비케 하였다. 다윗이 모세와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놓여진 원칙들에 따른 결과로서, 이스라엘은 점차로 모든 적들을 굴복시켰고,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까지, 남쪽으로는 애굽의 경계까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 그래서 그 결과로 그들은 솔로몬의 전 통치 기간동안 계속되고, 결코 다시는 버금갈 수 없는 국가적인 번영과 영광의 시기를 향유하였다.

 4. 주제
  사무엘상은 선지자와 사사들이 다스렸던 순수 신정 시대로부터 왕정 형태로 옮아가는 갑작스런 전이(轉移)를 기록하고 설명하고 있다. 사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왕국 형성에 따른 어떤 문제들을 나타내며, 왜 다윗의 집이 사울의 집을 대신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무엘하는 초기의 헤브론과 후기의 예루살렘에서의 영광스런 다윗의 통치를 다루고 있으며, 훗날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세워진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구입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다윗의 후기 생애와 죽음에 대한 설명은 열왕기상의 초반부에 나타나 있다.

 5. 개요
Ⅰ. 유다의 왕 다윗 1:1-5:5
     1. 사울 죽음 후의 다윗 1:1-27
      (1) 사울의 사망 소식 1:1-16
      (2) 사울을 위한 다윗의 애곡 1:17-27

     2. 다윗이 사울의 집에 의해 반대를 받음 2:1-3:39
      (1)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고 헤브론에서 통치함 2:1-7
      (2) 이스보셋이 아브넬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이 됨 2:8-11
      (3) 아브넬의 패함과 아사헬의 죽음 2:12-32
      (4) 다윗의 집의 흥왕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 3:1-5
      (5) 아브넬이 다윗에게 항복함 3:6-21
      (6)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함 3:22-39

     3. 다윗이 홀로 온 이스라엘의 권세를 잡음 4:1-5:5
      (1) 이스보셋의 죽음 4:1-8
      (2) 레갑과 바아나에게 내린 벌 4:9-12
      (3)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음 5:1-5

Ⅱ. 온 이스라엘의 왕 다윗 5:6-24:25
     1. 권세와 영화 중의 다윗의 초기 통치 5:6-10:19
      (1) 예루살렘을 점령함 5:6-16
      (2) 블레셋을 이김 5:17-25
      (3)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 6:1-23
      (4)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갈망 7:1-29
      (5) 외적들에 대한 승리 8:1-14
      (6) 왕국의 편제 8:15-18
      (7) 다윗이 므비보셋을 받아들임 9:1-13
      (8) 암몬 족속과 아람 사람을 물리침 10:1-19

     2. 다윗의 죄와 환란 11:1-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