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제
 신약의 다른 편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편지서도 한 통의 편지였기 때문에 원래는 표제가 없었을 것이다. 야고보서를 포함하고 있는 초기의 사본들 가운데 하나인 시내 사본(Codex Sinaiti- cus)에 의하면 이 편지의 서두에는 아무런 표제가 붙여지지 않았고 다만 맨 끝에 “야고보의 편지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후기의 사본들은 이 편지서가 어떤 특정한 회중이나 개인에게 보내진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 전반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일반 편지서 또는 공동 서신이라고 일컫고 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야고보서는 일반적으로 “일반 편지서” 또는 “공동 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7통의 편지서들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이 7통의 편지서들(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을 “일반 편지서” 또는 “공동 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일반적인 교회 즉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볼 때, 그 칭호를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 적용시키기에는 전혀 부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2통의 편지는 개인들에게 부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기의 사본들에서 이 7통의 편지서들은 한데 묶여서 사도행전 다음에, 그리고 바울의 편지서들 앞에 놓여졌다. 오늘날의 우리말 성경과 기타 언어로 된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반 편지서들의 순서는 주요 사본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서 그대로이다.
 2. 저자
 야고보서의 저자는 신원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을 내릴만한 충분한 증거가 야고보서 자체에는 없다. 신약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이름은 유대인들 사이에 매우 흔히 있는 이름이었는데, 그것은 히브리식 이름 야곱의 헬라식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이 자주 사용된 사실은 열두 사도들의 명단에서도 증명되고 있다(마 10:2, 3; 막 3:16-19; 눅 6:14-16). 이들 중의 하나가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인 야고보였다. 둘째번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이었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성경상 인물은 열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 제자의 이름은 유다였고, 신약에서 그를 일컬어 “야고보의 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의”라는 말은 흠정역에서 번역한 것처럼 “야고보의 형제”(눅 6:16)가 아니라 “야고보의 아들”이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성경에 알려진 여러 야고보들과는 전혀 다른 야고보라기 보다는 성경 기록 가운데 이미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 몇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야고보서 1장 1절의 서론에서 느낄 수 있는 음조는 이 편지서의 기자는 이것의 수신인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공인된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열 두 제자들이 모두 주님과 밀접히 교제하고 있었으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제자보다 더 뛰어난 제자였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저자가 바로 그 뛰어난 야고보라고 생각하는 저술가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가능성마저도 그가 죽은 연대가 이르다는 점(A.D. 44)과, 이 편지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교회내에는 두드러진 야고보가 둘 또는 그 이상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 뿐이었음을 암시하는 야고보서 1장 1절의 부가적인 사실로 인하여 매우 희박해진 것 같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두번째 제자는 알패오의 아들이었다. 그는 네번이나 그의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그 신원이 분명해졌다(마 10:3; 막 3:18; 눅 6:15; 행 1:13). 이 야고보가 “작은 야고보”(막 15:40)와 동일한 인물인지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알패오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으며 그는 또한 요셉이라는 한 형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마 27:56; 막 15:47; 16:1; 눅 24:10). 그러나 다른 곳에서 이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요 19:25). 알패오라는 이름에 상당하는 아람어 “칼파이”(Chalpai)와 연관시켜 알패오와 “글로바”(Cleophas, 눅 24:18)를 동일시 하려는 시도들이 있어 왔으나 그 두 이름이 참으로 동일인인지는 여전히 의심쩍은 문제로 남아 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작은 야고보가 동일인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편이 최상책으로 보인다.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이와같은 인물들 이외에 복음서의 기자들은 또 하나의 야고보, 곧 제일 먼저 열거된 것으로 봐서 예수의 네 형제들 중의 맨 맏형으로 생각되는 야고보를 언급하고 있다(마 13:55; 막 6:3). 작은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요셉이라는 형제가 있었고, 그의 어머니(계모마 12:46)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그러나 이 두 야고보들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마 27:56)라고 표현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서 바울은 자기가 회개한 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갔을 때, 모든 사도들 가운데서 오직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만을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의 다른 곳에서 야고보라고 불리운 교회 지도자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에는 신원을 밝혀줄 아무런 호칭이나 자격이 붙어있지 않다. 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은 후에 사도 행전에서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은 뒤로는 별다른 신원의 묘사없이 그냥 야고보로 알려질 만큼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지도자는 오직 한 사람 뿐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야고보에 대하여 그 후에 계속된 성경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나의 두드러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베드로가 헤롯의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그는 자신의 출옥 경위를 야고보에게 보고하라고 사람들에게 지시하였다(행 12:17).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교회 총회를 사회하였고 결의사항을 선포하였다(행 15:13, 19). 바울은 자기의 사업에 관한 것을 야고보에게 보고하였다(행 21:18). 야고보는 사람들에게 교회들을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갈 2:9). 이 야고보가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아마도 그의 장래의 책임에 관한 특별한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특별한 현시로 그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고전 15:7) 바로 그 야고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초기 교회의 “기둥”같은 인물 세 사람을 열거하면서 야고보를 제일 먼저 들고 있다(갈 2:9). 이 모든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이 야고보가 당시의 전반적인 교회를 향하여 자기를 소개하면서 단순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약 1:1)라고 말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야고보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인가, 아니면 주님의 형제 야고보인가 하는 것이다. 이 야고보를 알패오의 아들로 보는 편을 지지하는 사실로서 열 두 제자 가운데(행 1:13, 14),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나타났다가는 잠시 후에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언급도 없이 기록에서 사라지는 반면에 같은 이름의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무런 소개의 말도 없이 탁월한 존재로 나타나는(행 12:17)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이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로 보게 하는 증거들도 상당히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언급한 직후에 갈라디아서 2장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다시 언급한 것은(비록 그것이 입증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그 두 야고보가 동일인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나아가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에 관한 요세푸스의 이야기는 그가 교회 내에서 하나의 지도자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적어도 2세기로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교 전통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동일시하고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이 편지서의 저자에 관하여 서로 상치되고 모순된 견해들과 엇갈린 개인적 결론을 제시하였다. 그들의 오류는 주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요셉의 아들” 야고보와 동일시한 그릇된 관점과 갈라디아 1:19의 야고보와 갈라디아 2:9의 야고보는 동일인이라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는 결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요세푸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라 일컬어진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죽음은 베스도가 죽은 후에,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알비누스가 부임하기(A.D. 62)전에 있었으며, 야고보는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비록 유세비우스는 이것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의인” 야고보에게 적용시키고 있고, 또 요세푸스의 알려진 문헌에는 아무데서도 발견되지 않는 다른 인용구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요셉의 아들”야고보의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기록으로 보인다.
유세비우스는 또 말하기를 거룩한 책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예루살렘의 감독직을 맨 먼저 받은 야고보가 바로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보여 준다고 하면서 성경을 그 사실에 대한 권위있는 증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바울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의인” 야고보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인용한 본문이 진술하는 것 이상으로 짐작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유세비우스는 야고보를 구주의 형제들이라고 주장된 사람들 중의 하나로 언급하고 그가 또한 70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야고보를 “주의 형제”, “요셉의 자녀” 그리고 “의인”등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포로(A.D. 70) 직전에 순교를 당했다고 진술하고 글로바의 아들 시므온, 즉 어떤 사람들은 구주의 사촌이라고 말하는 시므온이 야고보를 계승하여 예루살렘의 감독의 지위에 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요세푸스가 말하는 야고보의 사망 연대와 모순을 빚고 있다. 그는 또한 시므온이 글로바의 아들이고, 유다는 육신적 혈통으로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시므온이 글로바의 아들이었고 글로바는 주(主)의 삼촌이었다는 그의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헤게시푸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다시 헤게시푸스가 말한 바 있는 시므온이 야고보의 삼촌이었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는 야고보의 생애와 죽음에 관하여 헤게시푸스가 기록한 그 유명한 이야기로부터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맥에 비춰볼 때 이 이야기는 그 기자가 함부로 고쳐 쓰고 매우 과장해서 기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클레멘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의인”이라고 일컬어진 한 야고보는 마전장이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다른 야고보는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클레멘트는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지만, 유세비우스는 첫번 야고보를 주님의 형제와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같은 귀절에서 그는 클레멘트의 말을 인용하여 “베드로와 야고보(세베대의 아들)와 요한은 구주의 승천 후에는 영광스런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찍이 구주로부터 존귀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감독으로 선택함을 받았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외경서인 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는 의인 야고보가 맹세하기를 주께서 그 잔을 마신 때로부터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을 보기까지는 떡을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는 진술을 함으로써 그를 주의 만찬 석상에 참여한 열 두 제자들 가운데에 분명하게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사실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떡을 취하셔서 축사하시고 떼셔서 의인 야고보에게 주시면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형제여, 당신의 떡을 잡수시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기 때문이오’라고 하셨다”. 여기서 “나의 형제”라는 귀절을 사용한 것은 이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비성서적인 자료들 중의 어느 하나도 이 편지서의 저자의 신원을 밝혀주는 일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편지서의 저자를 주님의 형제와 동일시함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그 저자가 헬라어 문장력에 있어서 상당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어휘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문체는 의식적으로 신랄한 공격형-대중의 인기를 끄는 윤리적 연설-으로 알려진 헬라식 문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형제 야고보에 관하여 알려진 것으로는 그가 그와 같은 작품을 쓸만한 배경을 가졌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는 갈릴리의 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문화적인 배경에 있어서 철저히 유대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제시된 모든 논증들이 잘 알려진 것에 근거하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더 많이 근거하여 주장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야고보서의 저자는 미결의 문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필경 그 저자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 언급되어 있는 야고보라는 이름의 주요 인물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이 편지서에 나타나 있는 많은 지리적인 암시들은 그것의 기록 장소가 팔레스타인일 것으로 짐작케 한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자가 기름과 포도주와 무화과 나무가 풍성한 나라에 살았다는 것, 그는 바다로부터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는 것, 그 근처에는 소금과 쓴 샘물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땅은 가뭄을 탔고, 그리하여 비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 등이다.
 이 편지서의 연대를 결정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진술한 바와같이 이 책이 기록된 것은 교회내에서 오직 한 사람의 두드러진 야고보가 있게 된 때, 따라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죽임을 당한 A.D. 44년 이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내적인 증거는 그 연대가 이른 것을 말해준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대집단에 대해서나 이방인들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회당이 아직 교회였고,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널리 퍼져 있었다(행 2:9-11; 4:36; 9:2, 10, 14, 19, 26; 11:19, 20). 이 편지서의 전반적인 취지는 그리스도는 모든 참된 유대교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4. 주제
 이 편지서는 진정한 산 믿음이 한 제자의 생애에서 어떤 결과 또는 행위를 산출하는지를 보여주는, 실제적인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제시하는 책이다. 편지서 전체를 통하여 강조된 사항은 참된 종교의 양상과 효과와 결과를 거짓 종교의 그것들과 대조시킨 것이다. 이 설교식의 편지서는 아름답고도 핵심을 찌르는 많은 예증들로써 가득 차 있다. 문체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어떤 분명한 계획에 의하여 정리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 명백하게 구분되는 사상들이 떼를 지어 제시되어 있다. 야고보는 그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여러가지 주제들을 취급하면서 그의 충만한 정서가 넘쳐 흐르도록 자유롭게 기록하고 있다. 야고보서에 산상 설교의 내용을 넌지시 가리키는 많은 귀절들이 있는데 그것의 부분적인 목록을 만들어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야고보서
5:3 2:5; 1:9
4 4:9
7, 9 2:13; 1:17
8 4:8
9 3:18
11, 12 1:2; 5:10, 11
19 1:19-25; 2:10, 11
22 1:20
27 2:10, 11
34 5:12
48 1:4
6:15 2:13
19 5:2
24 4:4
25 4:13-16
7:1 3:1; 4:11
2 2:13
7, 11 1:5, 17
7:8 4:3
12 2:8
16 3:12
21-26 1:22; 2:14; 5:7-9


 또한 이 편지서에는 바울의 기록들과 평행을 이루는 귀절들(약 1:22; 롬 2:13)과 베드로의 기록들과 평행을 이루는 귀절들이(약 4:7; 벧전 5:8, 9) 많이 있다.
 5. 개요
Ⅰ. 인사 1:1

Ⅱ. 시험과 유혹 1:2-18
     1. 인내와 지혜의 필요성 1:2-8

     2. 세상적인 고난을 당할 때나 존귀를 누릴 때에도 참음 1:9-12

     3. 시험과 유혹의 근원 1:13-18

Ⅲ. 참된 종교의 증거들 1:19-27
     1.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듣기 1:19-22
     2. 듣기도 하고 행하기 1:23-27

Ⅳ. 초기 교회에 있던 공통적인 위험들에 대한 경고 2:1-5:6
     1. 사람을 외모로 취함에 대하여 2:1-13

     2. 단순한 믿음의 공언에 대하여 2:14-26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가치함 2:14-20
      (2) 행함을 낳는 진정한 믿음의 실례들 2:21-26

     3. 혀가 짓는 죄에 대하여 3:1-18
      (1) 특히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혀를 잘 조정할 것 3:1, 2
      (2) 혀를 잘 사용한 경우와 잘못 사용한 경우의 예증들 3:3-12
      (3) 혀의 사용을 포함한 적절한 행위에 대한 권면 3:13-18

     4. 형제들 사이의 다툼과 싸움에 대하여 4:1-17
      (1) 다툼의 근원과 자기 추구 4:1-4
      (2) 하나님께 굴복하라는 권면 4:5-10
      (3) 비방을 하지 말라는 권면 4:11, 12
      (4)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라는 권면 4:13-17

     5. 부정한 이득과 재물의 오용에 대하여 5:1-6

Ⅴ. 마지막 권면 5:7-20
     1.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인내가 필요함 5:7-11

     2. 적절한 행위가 언제나 필요함 5:12, 13

     3. 병든 자들을 돕는 일에 기도가 유효함 5:14-18

     4.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라는 권면 5: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