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제
  영어의 책명(Psalms, 또는 Psalter)은 70인역의 프살모이(Psalmoi)에서 기원하는데, 프살모이는 프살모스(Psalmos)의 복수형이다. 이것은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말이다. 한 사본은 프살테리온(Psalterion)이라는 책명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서 “살터”(Psatter)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프살모스는 수많은 시편에 대한 전문 명칭인 히브리어의 미즈몰(mizmor)을 헬라어로 옮긴 것이다. 미즈몰의 어근은 자말(Zamar)로서 그 의미는 “악기에 맞추어 노래 부르다” 또는 “노래하다”,“찬양하다”이다. 히브리 성경은 책명을 테힐림(Tehillim­“찬양들”)이라고 한다. 테힐림은 “찬양하다”라는 하랄(halal)에서 파생되었다. 하랄은 할렐루야(hallelujah)라는 단어 속에서 그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경전(기독교인의 구약)을 세가지로 구분하였다-율법(Torah­토라) 선지자들(Nebi’im­네빔), 책들(Kethubim­케투빔)-.이상의 구분된 “책들”속에는 세 편의 시집, 곧 시편, 잠언, 욥기가 있다. 또한 아가,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 등 다섯 편의 두루마리(Megilloth­메길로트),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등의 역사서가 이에 속한다. 시편은 “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이 그룹을 때때로 대표하는 명칭이 되었다(수사법에서 이것을 대유법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종종 자기들의 경전을 “율법, 선지자, 시편” 세가지로 구분하였다(눅 24:44).

  2. 저자
 시편은 수많은 작가들에 의하여 영감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아마 최종적으로 집대성 된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손에 의해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 직후의 시대에 몇몇 서기관들에 의해 집대성되었을 것이다. 시편의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시에 그 표제들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이야 말로 시편의 기원을 지적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이러한 표제들도 본문에 속한다. 이러한 표제들이 70인역 성경보다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시편들이 편집된 이후에 덧붙여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보고 있다. 따라서 이 표제들에 대한 타당성과 신뢰성이 문제되고 있다. 이들 학자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이러한 표제의 기원이 모호하다.
 (2) 때때로 이들의 개념적 내용이 불분명하다.
 (3) 몇몇 시편의 내용과 문체는 표제의 진술과 암시에 어긋난다.
좀 보수적인 시편 학자들은 표제의 분명한 진술 들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 그 타당성의 이유를 들자면,
 (1) 70인역 성경에 이것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고대성은 적어도 B.C.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사실상 70인역의 성경보다 휠씬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70인역의 번역자들은 수 많은 표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2) 이것들은 히브리 본문 자체의 일부로서 우리에게 전수되어 왔기 때문이다.
 (3) 히브리 서정시들은 아주 초기부터 표제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4) 표제들은 이에 의하여 도입된 시편들의 의미와 기별들을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배경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의 표제들 가운데 8명의 개인 이름이 나오는데 이들은 저자, 기고자, 편집자, 음악가들이거나 작곡, 편집, 거룩한 서정시의 사용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름은 다윗, 아삽, 고라, 모세, 헤만, 에단, 솔로몬, 여두둔이다.
  이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윗이다. 몇몇 현대인들은 다윗이 시편의 주요 작가이며 중요한 기고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견해를 뒷받침하는 많은 논거들이 있다(삼상 16:15-23; 삼하 23:1; 암 6:5). 그는 애정이 깊으며 뛰어나게 도량이 큰 사람으로서(삼하 1:19-27; 3:33, 34) 위대한 신앙과 깊은 감수성을 지녔다. 이러한 것들을 열렬하게 여호와를 경배하는 모습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현명하고 호의적인 지도 아래에서 이스라엘 안에는 음악이 번성하게 되었다. 이교의 요새지이며 여부스인들의 도읍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됨으로, 또한 법궤를 시온산에 안치함으로 공중 예배의 중요성은 증가하였고, 거룩한 의식을 위한 찬미가와 작곡과 음악이 장려되었다.
 다윗은 천연계와 친숙하였으며, 율법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역경과 슬픔과 시련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의 생애를 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찬란한 인생을 살았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다윗의 보좌 위에 한 영원한 왕을 세우겠다는 보증을 주셨다. 이러한 체험들을 통하여 이새의 아들, 목동 왕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애타게 갈구하는 가장 감미롭고, 가장 비애적인 노래들을 부를 수 있었다. 더우기 시편 속에는 다윗의 생애에 대한 언급과 암시, 다윗의 개성과 탁월함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시편에 언급되어 있는 다윗의 이름과 사무엘하 22장과 대상 16:1-36에 인용된 시편의 단편들은 저작권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신약 성경의 마 22:43-45; 막 12:36, 37; 눅 20:42-44; 행 2:25; 4:25; 롬 4:6-8; 11:9, 10; 히 4:7에는 다윗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논증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화잇 여사의 글들도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부조 642-754, 교육 164, 165).
 73편의 시에 “다윗의”라는 표제(히,ledawid- 레다윗)가 있다. 제1권에 37편, 제2권에 18편, 제3권에 1편, 제4권에 2편, 제 5권에 15편이다(시편은 책별로 구분되어 있음). 이 73편의 시들은 일반적으로 다윗의 작품(수집품)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어느 시에 “다윗의” 곧 레다윗(ledawid)이라는 표제가 붙었다고 해서 그 시를 다윗이 지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히브리어의 전치사 레(le)는 수 많은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저작권도 그 중에 하나이다. 때때로 레는 “…에게 속한”이란 관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레다윗은 “… 의 선집에 속한”이란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증거들을 통하여 우리는 다윗이 이들 시중에서 적어도 상당수의 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유 명사와 함께 전치사 레가 사용되는 용법에 관하여 바른즈(Barne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제목은 선집의 모든 시들이 다윗의 손으로부터 나왔음을 의미하거나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다는 것을 크게 강조하는 것 뿐이다.”
  12편의 시는 “아삽의”(le’asaph)라는 표제를 갖고 있다(시 50, 73-83편). 레다윗과 마찬가지로 레아삽도 저작권을 강력히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에 여러 개의 시는 다윗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이 분명하다(시 73, 77, 80편의 개론들을 참조하라).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다윗의 찬양대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다윗처럼 아삽은 선견자요 작곡자였다(대상 6:39; 대하 29:30; 느 12:46).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포로들의 명단 가운데서 아삽 자손만이 유일하게 노래부르는 자로 언급되었다(스 2:41).
 11편의 시는 “고라 자손의”를 그 표제로 한다(시 42, 44-49, 84, 85, 87, 88편). 흠정역은 “고라 자손을 위한”으로 번역하였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전치사 레가 사용되어 있는데 이 말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의”라는 소유 관념을 갖고 있다. 고라 자손들은 모세의 권위에 도전함으로 그들의 부친 고라가 형벌을 당할 때에 그 처벌에서 벗어 났다(민 16:1-35). 그 후에 후손들은 성전 예배의 지도자들이 되었다(대상 6:22; 9:19).
“고라 자손의 시”로 지칭된 한편의 시(시 88편)는 “에스라의 헤만의 마스길”이라는 표제도 아울러 갖고 있다. 헤만은 요엘의 아들이며 사무엘의 손자이다. 그는 레위 지파의 고핫 가계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성전 음악의 지도자였다(대상 6:33; 15:17; 16:41, 42).
  세편의 시(시 39, 62, 77편)에는 여두둔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는 성전 음악가들의 무리를 이끌었다(대상 16:41, 42). 그는 성전 음악의 편곡, 또는 편집에 관여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 제목은 여두둔 외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 세편의 시는 여두둔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여두둔이 작곡한 가락에 맞추어 노래 부르도록 의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의 시(시 89편)에는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왕상 4:31 참조).
  두편의 시(시 72, 127편)에는 “솔로몬의”(lishlomoh, 흠정역은 ‘솔로몬을 위한’)라는 표제가 나타난다.
한편의 시(시 90편)에는 “모세의 기도(lemosheh)”라는 제목이 있다.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시에는 어떤 표제도 없으므로 작자 불명으로 볼 수 밖에 없다(이것들을 고아 시편이라고 부른다). 시편의 작곡가들 중에는 에스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학개와 같은 구약의 유명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3.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엽부터 표제 속에 언급된 사항들을 연구하므로 시편의 저작권과 시기를 밝히려는 근대적인 시도가 행해졌다. 근대의 학자들은 시편이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알렉산더 얀내우스(Alexander Jannaeus, B.C. 78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일천년 이상의 기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들은 끊임없이 분분(紛紛)한 의견을 내고 있다. 에발드(Ewald: 영국의 번역가, 1880년)는 13편의 시를 다윗 시대에 한정하며, 나머지 대부분의 시는 포로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케이네(Cheyne)는 16편의 시가 포로기 이전에 기록되었으며(주로 요시야 통치 동안에), 나머지 모두는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중 30편을 마카비 시대로 돌린다. 성서 신학자들 사이에 고등 비평이 휩쓸게 되자 다윗과 그의 시대에 속하는 시편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포로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추세를 보였다. 이들은 주로 페르시아와 헬라 시대에 기록되었으며, 몇몇 작품은 분명히 마카비 시대의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일반적 추세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었으며, 시편의 연대를 중간 시대, 혹은 페르시아 시대로 잡게 되었다. 이스라엘 인접 국가들의 성시 송독(psalmody)에 관한 최근의 지식을 통하여 수많은 시들이 포로 이전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아주 최근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견물들을 통하여 특히 라스 삼라(Ras Shamrah) 토판들의 발굴을 통하여(1929년 이후), 시편의 상당수가 팔레스타인 초기의 역사에 해당함을 입증하게 되었다. 부텐비제르(Buttenwieser, 1938)는 시편의 연대를 여호수아로부터 헬라 시대까지 잡았으며, B.C. 312년 이후에는 어떤 시도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편이 일천년 간의 역사적 배경을 무대로 지어졌다고 본다. 많은 각각의 시들이 모세와 다윗으로부터 곧 이어지는 포로기까지의 히브리인들의 역사 중 어느 시기에 정확히 기록되었는지 확정될 수 없지만, 이들이 기록된 시기는 이러한 범주에 해당한다고 결론짓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시편의 수 많은 시에 관한 저작권과 시기를 확정지으려는 여러가지 가설들은 때때로 매우 기발하여 흥미를 끌기는 하지만 대개가 결정적인 것은 전혀 못된다. 시편의 표제가 가진 신빙성에 관하여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현대 학자들이 부정하게 된 이유 때문에 너무 상이한 견해들이 출현하게 되어 문제는 거의 절망적인 혼란 가운데 빠져 있다. “시편 기자”라는 단어가 이러한 설명에 사용되었을 경우, 이것은 어떤 특정 인물, 예를 들면 다윗이나 아삽 자손 중 한 사람이나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을 특별히 지적하는 것은 아니며, 일반적인 저작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수 많은 시의 저자와 그 역사적 배경이 비록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시편 전체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벧후 1:21)을 우리가 믿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최근에 이루어진 고고학적인 발굴 중에 시편 이해에 가장 두드러진 기여를 한 것은 북부 시리아의 라스 삼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대에는 우가릿으로 불려졌다). 1929년 이후로 이곳에서는 발굴이 이루어져서 수많은 토판들이 출토되었다. 이 점토판들은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발굴 당시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으나 한스 바우에르(Hans Bauer)교수와 도르메(P. Dhorme)의 노력을 통하여 해독되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들 중에는 고대 가나안의 종교를 다룬 신화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문서에 대한 연구는 일종의 특별 학문이 되고 있는데, 이를 일컬어 우가리틱(Ugaritic)이라고 한다. 우가리틱이란 명칭은 이들 문서가 기록된 언어와 원고에도 마찬가지로 주어졌다.
 우가리틱은 B.C. 20세기 중엽에 서북부 시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사용한 가나안족의 방언이다. 히브리인들의 언어는 고대 가나안족의 언어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우가리틱 종교 문학은 구약 성경의 애매 모호한 귀절들과 단어들에 관해 많은 빛을 던져 주었는데, 특히 시편에 대하여 그러하다. 우가리틱 종교문학의 용어와 어휘는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미미한 차이만을 보이고 있을 따름이다.
 시편의 모호한 귀절들에 대하여 많은 근대 비평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도 휠씬 이전에 기록된 것임을 밝히 드러내었다. 비평학자들이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시들이 B.C. 20세기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귀절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귀절들은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던 것들이다. 이것은 각 시편의 표제가 보여주고 있는 이른 시기에 이들 시가 기록되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가리틱이 시편에 끼친 가장 큰 공로는 어휘와 문체에 있다. 한때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추측으로나 알 수 밖에 없었던 모호한 구절들을 이제는 우가리틱 연구를 통하여 분명하게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영어 성경 본문이 올바로 번역되었음을 확증하였으며, 그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제대로 된 것임을 확증하였다. 시편 연구에 있어서 우가리틱의 흔적을 드러낸 선구자들로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알브라이트(W.F.Albright), 긴스버그(H.L. Ginsberg),고든(C.H. Gordon), 카수토(U. Cassuto), 파톤(J.H. Patton).

 4. 주제
 인간이 곤경에 처한다­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호감을 사는 시편의 주제이다. 성스러운 이들 시 속에서 우리는 히브리인 뿐만 아니라 온 인간이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전능하신 분께서 당신의 손길을 펴서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수세기를 통하여 시편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개인 기도와 공중 헌신을 위한 수 많은 자료들을 제공해 왔는데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공적인 의식을 위하여, 기독교인은 찬미가로서 시편을 사용하였는데 모두에게 동일한 만족감을 느끼게 하였다. 인종과 신조를 불문하고 시편은 고독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도서가 되었다.
  히브리인들이 시편을 사용한 일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거리가 많다. 시편은 사생활 뿐만 아니라 공중 예배에 있어서도 백성들의 헌신을 표현하는 일에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성전 예배에서 주요 부분은 시편을 노래 부르는 것이었다. 성가대가 서로 번갈아 가며 부르던지, 성가대와 회중이 서로 응답해 가며 부르는 것이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 미쉬나와 탈무드에 의하면 주일 중 각 달마다 불러야할 시편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편은 전제물을 부은 후 매일의 제사가 끝났을 때에 불려졌다.
 대 절기들을 위하여서는 특별히 선정된 시편이 있었다.-유월절(시 113-118, 135편), 칠칠절, 초막절, 수전절(시 30, 118편), 월삭(시 81편-이날의 제사에는 시편 29편을 함께 부름), 초막절의 첫날밤 (시 120-134편).
회당에서는 성전에서의 제사가 매일의 기도로 대체되었으며, 성전 예배와 가능한 한 일치하도록 매일의 예배가 행해졌다. 성전이 파괴된 후에는 율법서와 선지서들을 낭독함과 아울러 기도로서 시편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공중 예배에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도록 했다. 특별한 경우에는 특정 시편을 사용하였다. 7편은 부림절에, 12편은 초막절의 제8일에, 47편은 신년에, 98편과 104편은 월삭에, 103편과 130편은 대속죄일에 사용되었다. 백성들은 위대한 할렐들을 암송하고 있었다 “할렐들” 혹은 “할렐루야들”은 상호간에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시 104-106; 111-113; 115-117; 135, 145-150편).
  오늘날 회당에서 사용하는 시편들은 의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동유럽계, 스페인과 포르투갈계, 예멘계, 이탈리아계 등등), 모든 의식 중에서 시편은 가장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통 유대교인의 생활 속에서 시편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예배자의 매일 기도 중에 주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에서 세운 양상을 어느 정도 답습(踏襲)하여 왔다. 나사렛 예수는 구약의 어떤 책에서 보다도 시편과 이사야로부터 많은 인용을 하였다. 이사야를 제외하고는 시편만큼 많이 신약에 인용된 책이 없다. 초대 교회는 예배에 시편을 끌어 들였으며(고전 14:26; 엡 5:19; 골 3:16; 약 5:13), 그 이후의 교회도 세기를 거듭하면서 이 일을 그대로 따랐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약 347-407)은 모든 형태의 예배에 시편이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증언하였다. 중세 교회에서 성직자들은 매 주일마다 전(全) 시편을 낭송하였다. 성 패트릭(St. Patrick)은 매일마다 낭송하였다고 전해진다.
 시편은 카톨릭 의식에 있어서-로마 카톨릭이든, 동방 교회든지를 불문하고-확정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공회와 복음주의를 따르는 기독교의 예배에 있어서도 그러한 위치를 계속해서 지키고 있는데 최근의 관측과 체험이 이것을 확증하고 있다.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이란 주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시편은 그 소재들을 백성들의 개인적, 국가적 생활 속에서 얻고 있다. 이들은 슬픔과 기쁨, 좌절과 성취, 실망과 만족을 수 없이 많이 체험한 자들이다. 마음에 사무치도록 깊은 체험을 하고 자신들의 감정을 자유 자재로 구사한 이들의 반응에서도 소재를 얻고 있다. 그러므로 시편은 유한한 인간의 각종 가능한 체험을 반영하며 각 사람의 정서를 실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잇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윗의 시편은 고범죄와 양심의 가책의 깊은 구렁에서 최고의 신앙과 하나님과 교통하는 최고의 지위까지의 모든 경험의 범위를 꿰뚫어 있다”(부조 754).
 질병과 회복, 죄와 용서, 슬픔과 위로, 연약함과 강성함, 쇠퇴와 부흥, 무의미함과 의미 있음 등에 관하여 시편은 다루고 있다.
  어떤 분위기와 어떤 처지에서도 그에 알맞는 시편을 찾을 수 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 연로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질병에 걸린 사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시편이 있는가 하면 젊음과 활력이 넘쳐 흐르는 사람, 소망을 지닌 사람, 진실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뢰하고 승리하는 성도 등에게 알맞는 시편이 있다.어떤 시편의 경우에는 너무나 풀이 죽어서 소망의 기운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어떤 시편은 한마디의 애소의 말도 없이 오로지 찬양만 한다. 죄인이 주 날개 밑, 주님이 거하시는 은밀한 곳에서 다만 자기 홀로 하나님께 자기의 심령을 토로하는 시편들도 있다. 하나님의 성도가 경배드리는 대 회중과 함께 온갖 악기에 맞추어 하나님께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시편들도 있다. 이 모든 시편은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해결자로서 하나님을 높이고 있으며, 하나님이야 말로 궁극적인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의 소망, 우리의 신념, 우리의 능력, 우리의 승리-이러한 것들은 메시야 안에 구현되어 있다. 그분께서 임하심으로 구속이 이루어지고, 영원한 의의 통치가 온 우주에 시작되는 것이다. 시편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신다. 시편들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신성(시 45:6; 110:1), 아들됨(시 2:7), 성육신(시 40:6, 7), 제사장직(시 110:4), 배반(시 41:9), 거절(시 118:22), 부활(시 16:9, 10), 승천(시 68:18)등을 예언적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시편의 황금 열쇠는 못박힌 손 안에 놓여 있다”(알렉산더).
 시편 기자는 자기의 주제를 다방면으로 전개시켰는데, 그중에서도 다음 사항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1) 헌신적인 사람은 하나님 존전에 거하는 것보다도 더욱 큰 축복을 감히 상상도 할수 없으며, 그분의 존전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보다도 더욱 큰 저주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2) 우주의 창조주, 지극히 높으신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동시에 자애로운 아버지, 온유한 목자이시다.
 (3) 참된 신앙을 통하여 강렬한 기쁨을 체험하고 온갖 풍부한 표현을 갖게 되며, 인간적으로 가치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게 된다. “야훼여, 이 마음 다 바쳐 감사 드립니다”(시 9:1 공동 번역).
 (4) 간청과 감사는 언제나 함께 나타난다. 기도와 찬송은 단짝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축복을 간청할 때, 그분의 풍성한 축복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간구하는 축복들을 이미 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5) 경건한 심령은 천연계를 깊이있게 바라다 볼때마다 창조주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 결코 바라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6)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과거 생애 동안 축복을 내려 주셨으므로 현재와 미래에도 그들에게 계속해서 축복을 주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7) 의로움 올바르게 행함은 궁극적으로 상급을 받는다. 대체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만족스러운 삶을 이 세상에서 누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의-악하게 행함-는 고통을 초래하고 궁극적으로 사망이 이르러 온다. 한 동안 악인이 번영하는 듯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통하여 그들의 우매한 길이 드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따른 당연한 결과를 맞을 수 밖에 없다.
 (8)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기의 체험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특권이요, 의무이다. 어떤 시편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강렬한 민족주의는 다른 곳에서 시편 기자가 가진 전세계적 교회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9) 고난, 고통, 질병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속의 계획의 일부로서 교훈과 경고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모든 인생 문제는 메시야의 오심과 그분의 영원한 의의 왕국이 임하므로 궁극적인 해결을 본다.
 (10) 하나님의 정부에서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10). 율법과 복음이 완전하게 일체를 이룬다.
수많은 국면을 지닌 시편의 방대한 주제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편 기자는 최적 수단으로 서정시의 형태를 취하여 인간 내면 깊은 곳의 통찰력과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하는 높은 갈망감을 묘사하였다. 시편은 “서정시의 극치”이다(물톤, Moul-ton). 그러나 시의 운문적 형태에 친숙한 사람이 무심코 시편을 읽게 되면 시편이 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서양의 시는 전통적으로 규칙적인 강세와 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히브리 시는 시에서 이러한 것을 찾기는 힘들다. 시편에 이르러 최정점에 달한 히브리 시는 서양의 시와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히브리 시의 리듬은 강세가 있는 음절과 없는 음절이 규칙적으로 나타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어 시처럼 이들은 각운과 요운을 갖고 있다. 불규칙적인 강세는 히브리 시의 외적인 특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성질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으며, 충분히 이행되어 있지도 않다. 간혹 인접한 절들은 유사한 음으로 끝나는데 이것을 시적 특징을 주기 위한 음운적 배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모습은 영역 가운데는 결코 나타나 있지 않다. 음운에 있어서는 히브리 시가 영어 시보다도 더욱 융통성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근동 지방의 시가들이 지닌 공통점이다. 매우 융통성이 크기 때문에 그 내적 구조 가운데서 시 전체를 이루는 사상들의 발전과 관계를 알 수 있다.
 히브리시의 주요 특징은 대구법이라고 불리우는 사상의 리듬이다. 이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문구를 나란히 벌여 격조를 맞추는 것이다. 이런 특별 구문은 조수의 밀물과 썰물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독일의 한 문필가는 “염려스러운 마음이 치솟는 것과 그것이 가라앉는 것”으로 비유를 하였다. 이것은 국경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을 울리는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영문 흠정역 성경은 매우 균형지게 배열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동양적 음운 형태를 독자들은 거의 상실되지 않은 채로 만족스럽게 맛볼 수 있다.
대구법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동의적 대구법 : 둘째 구절이 동일한 사상을 말만 바꾸어 나타내는 것으로서 두 구절은 하나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시 18:5)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시 71:9)

 (2) 반의적 대구법 : 둘째 구절에서 첫 구절과 사상이 대조되거나 그 반대인 경우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시 71: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3) 종합적 대구법 : 둘째 구절이 첫째 구절을 보충하거나 첫째 구절의 사상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 18:3)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1)

 5. 개요
 (1) 분류
 시편은 그 주제와 목적에 따라 여러가지로 분류되었다. 바네스(Barnes)는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미가들
  ② 히브리인들의 국가적인 찬미가들
  ③ 성전 노래들
  ④ 국가적, 개인적 고난과 재난을 주제로 한 시편들
  ⑤ 종교적, 도덕적 시편들

 켄트(Kent)는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사랑과 결혼
  ② 찬양과 감사
  ③ 숭배와 신뢰
  ④ 기도
  ⑤ 회고적이며 교훈적인 시

 맥 파이덴(Mac Fayden)은 11개의 주제하에 시편들을 배열하였다.
  ① 숭배
  ②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
  ③ 왕
  ④ 회상
  ⑤ 감사
  ⑥ 예배
  ⑦ 역사
  ⑧ 저주
  ⑨ 통회
  ⑩ 탄원
  ⑪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시편들

 궁켈(Gunkel)은 이스라엘과 유다뿐 아니라 인근 근동 지방의 종교적 서사시들을 연구하였다. 자신의 연구에 근거를 두고 그는 다음과 같은 5대 유형을 주장하였다.
  ① 시온의 노래들과 대관식 시편들을 포함하는 찬미들
  ② 공공적인 애가
  ③ 왕의 시편들
  ④ 개인적인 애가
  ⑤ 개인적인 감사의 노래들
 이것을 그는 혼합 시편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형태와 목적에 따라 물톤(Moulton)은 시편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① 서문적인 시
  ② 극적인 독백들
  ③ 답관체 시편(踏冠體, acrostic: 각 행의 머릿 자를 모으면 말이 되는 시)
  ④ 극적인 송가
  ⑤ 예루살렘의 즉위를 위한 송가
  ⑥ 의식
  ⑦ 축제의 찬미
  ⑧ 맹세의 찬미
  ⑨ 연도(제사장이 먼저 읊는 기도문을 따라 신도들이 읊는 형식)
  ⑩ 국가적 애가
  ⑪ 특별한 때에 지은 찬미
  ⑫ 축제의 송가

 다음과 같은 분류는 각각에 대한 정의와 아울러 전형적인 예들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사상의 다양성과 주제의 포괄성을 보여주고 있다.
  ① 천연계(시 8, 19, 29, 104편)­ 땅과 밀착해서 살아가는 히브리인들은 천연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천연계에 대한 사랑 그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언제나 천연계의 하나님을 제시하였으며, 창조주의 권능과 위엄을 높였다. 사무엘 테일러 콜러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샤무니 계곡의 일출전 찬미”(Hymn before Sunrise in the Vale of Chamouni)라는 시는 히브리인들이 천연계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를 뛰어나게 닮은 영시 중의 하나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천연계를 명상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이르른다.
  ② 역사적 및 국가적인 시(시 46, 68, 79, 105, 106, 114편)­ 히브리인들은 침체 또는 호황에 빠졌었던 과거의 풍부한 체험들로부터 매일의 생활을 위한 경고와 미래를 위한 영감을 이끌어 냈다. 그들의 애국심의 초점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었다. 국가적인 위기의 시기에 영감을 제공하신 분은 다름아닌 하나님 그 자신이셨다.
  ③ 교훈(시 1, 15, 34, 71편)­시편에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권면이 풍부하다.
  ④ 메시야적(시 2, 22, 69, 72, 110편)­메시야의 신적 속성과 인간적인 비하(卑下), 그의 겸비와 승귀(昇貴), 그의 고난과 영광, 제사장적 봉사와 왕적 위엄, 궁극적인 승리와 영원한 그의 통치의 축복 등이 나타나 있다. 선지자, 왕, 구속주, 제사장으로서의 신약적 그리스도의 모습이 시편에 예시되어 있다. 시편 안에서 메시야에 대한 조직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어떤 이들은 말하고 있다. 메시야적 시편이다. 혹은 제사장적 시편이다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거의 없다. 다윗은 감미로운 가수였을뿐 아니라 선지자이기도 하였다(행 2:29, 30).
  ⑤ 통회적인 시(시 6, 32, 38, 51, 102, 130, 143편)­성경에서 걸출한 고백자 중의 한 사람은 다윗이다. 끔찍스러운 죄를 짓고, 자기의 죄에 대하여 냉혹하게 정죄하며, 슬픔과 통회하는 심령을 갖고 구주의 발앞에 자신을 맡겼다. 일곱편의 통회적인 시편 가운데서 다섯 편이 시인이요, 왕인 다윗의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선지자로부터 작은 암양 새끼에 대한 비유를 들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하였다(삼하 12:1-13).
  ⑤ 저주(시 35, 52, 69, 83, 109편)­수많은 시편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의 음조는 그리스도께서 원수에 대하여 취할 태도를 천명하신 것과는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마 5:44). 이 문제에 대하여 주석가들이 제시한 광범위한 제안은 알맞은 조명을 줄 것이다.
 1) 저주의 표현은 명령적이라기 보다는 예보적인 것이다. 그 형벌을 시편 기자는 미리 보고 있다. 그 형벌은 시편 기자의 간청 때문에 이르러 오는 것은 아니다. 저주의 말은 경고적인 진술로 간주되어야지 시편 기자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2) 히브리인들의 사고와 표현의 구체성 때문에 죄와 죄인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 쉬운 경향이 있다. 히브리인들은 죄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죄인 안에 구체화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죄와 죄인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3)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이방의 공격을 하나님께 가해진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내려야만 한다고 느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음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말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을 대변하였다.
 원수들이 자기를 핍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이런 면을 염두에 둔다면 모세가 신명기에 나타난 강력한 연설을 할 때에 때때로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어떤 설명도 없이 지체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신 11:13-15; 29:5, 6 참조).
시편 기자는 거룩한 영감 아래에서 기록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죄를 저주할 뿐 아니라 죄인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할 권리를 가졌다. 원수들에 대한 이러한 저주들과 함께 우리는 죄에 빠진 이스라엘 자신에 대하여 선고한 저주에 대해서도 살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저주들은 레 26장, 신 27, 28장, 사 5:24, 25; 8:14, 15; 렘 6:21; 7:32-34에 있으며,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강경한 어조로 말씀하셨고(마 23장), 신약 기자들도 행 5:3, 9; 갈 1:8, 9; 5:12; 약 5:1-3절에서 그러하였다. 이상의 성경절을 보아서 우리는 저주가 시편, 혹은 구약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4) 죄인들에 대한 저주의 기사는 이러한 시들이 기록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당시 인간들은 강력한 용어와 활기찬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성경 기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인간의 언어를 빌어 인간들에게 친숙한 문체로 말하였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표현하신 것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표현 양식일 따름이다. 하나님은 기록하신 분으로 진술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러한 표현은 하나님답지 않은 것이라고 때때로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 있는 말들과 논리들과 수사학이라는 심판대 위에 자신을 두지 않으셨다(원고 24, 1886).
 ⑦ 기도, 찬양, 숭배(시 16, 55, 65, 86, 89, 90, 95-100, 103, 104, 107, 142, 143, 145-150편)­기도 드리고 있는 시편 기자의 음성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시 3:4),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39:12), 찬양과 숭배: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인생의 모든 체험이 그 배경 위로 솟아올라서 찬양의 주제가 되었다.
  ⑧ 순례(시 120-134편)­“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란 표제가 붙어 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대축제를 위해 순례하는 사람들이 부른 노래들임이 분명하다.
 히브리어로는 이들 시편을 “시르 함마아로트”(shir hamma‘aloth)라고 일컫는다(시 121편은 시르 람마아로트-shir lamma- ‘aloth-라 지칭되어 있다). 마아라(Maalah)는 “올라가다”라는 뜻을 지닌 어근, 아라(alah)에서 왔다. 마아라는 바벨론으로부터 고국으로 올라오는 데, 또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데 사용되었다(스 7:9). “층계”(출 20:26; 왕상 10:19), “일영표의 계단”(왕하 20:9; 공동 번역 참조)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들 시편에 있는 마아라는 예루살렘의 절기를 위하여 순례하는 것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쉬나는 성전에서 이들 15편의 시편을 전통적으로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거룩한 사람들은 …노래와 내려가는 열다섯 계단에 서서 수금을 들고 서 있었다. 이것은 시편에 있는 열 여섯개의 마아로트 수효에 일치하는 것이다.” 초막절 첫날, 레위인들은 온 밤을 지새우며 열리는 잔치 동안에 이스라엘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있는 열 다섯 계단에 서서 이들 시편을 노래하였다. 이때에 여인의 뜰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매우 밝았다.
 ⑨ 알파벳 순서로 배열한 시편, 혹은 답관체 시편(9, 10, 25, 34, 37, 111, 112, 119, 145편)­히브리 본문에서 알파벳 순서로 각 절의 첫 문자들이 연속되어 있다. 이런 사실을 영문 번역에서는 알아 볼 수 없는데, 흠정역의 경우에 시 119편은 예외이다.
 1) 각 절의 첫 문자가 알파벳의 순서대로 배열 된 것(시 25, 34, 111, 112, 145편 시 25, 34편은 약간의 예외가 있다).
 2) 한 절씩 뛰어가며 알파벳이 이어지는 것(시 37편), 또는 떨어진 간격으로 절 처음에 알파벳이 등장하는 경우(시 9, 10편).
 3) 8개의 절로 구성된 22연이 합쳐서 하나의 시편을 이룬 경우(시 119편). 각 절은 모두 동일한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연은 알파벳의 순서를 따라 전개됨.
 이렇게 답관체를 사용한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독자들의 기억을 돕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이들 시편은 현대의 ABC책보다도 2,000년 이상이나 앞서 있다. 답관체 시편은 대체로 주제를 활발하게 전개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상이한 단어들과 다양한 예증으로 반복한다. 문체적으로 이들은 표현의 풍부함이 그 특징이다.
 (2) 구 성
 시편은 매우 일찍부터 다섯 책으로 구분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다섯책을 모방하였을 것이다. 시편 1편을 언급하면서 미드라쉬는 “모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다섯 율법서를 주었다. 이것에 부응하기 위하여 다윗은 시편을 다섯 책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5중 구분은 70인역 보다도 더욱 오래된 것이 틀림없는데, 각 책의 끝에 송영과 “아멘”이 삽입되어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제5권은 예외이다. 이 책은 확충되어 절정을 이루는 송영으로서 전(全)시편의 결론 역할을 한다.

  시편은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되어 있다.
 제1권(시 1-41편)­송영과 이중 “아멘”으로 종결되고 있다.
  제2권(시 42-72편)­이중 송영과 이중 “아멘”으로 종결되면서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시 72:29)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제3권(시 73-89편)­송영과 이중 “아멘”으로 종결되고 있다.
  제4권(시편 90-106편)­송영과 “아멘”, 그리고 할렐루야로 종결되고 있다(“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시 106:48).
  제5권(시 107-150편)­시편 150편으로 종결지어지는데, 시편 150편은 할렐루야가 시종을 장식하고 있으며 이 시편 자체가 할렐루야의 확장이다.
 시편 속에는 다윗, 아삽, 고라의 선집등 이미 언급한 것들 외에도 여러 개의 작은 시편들이 있다.
 시 51-72편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라 일컬어진다(시 72:20). 시 52-55편은 마스길을 모은 것이며, 시 56-60편은 믹담을, 시 57-59편은 알다스헷을 모은 것이다. 시 113-118편은 애굽 할렐(Egyptian Hallel)인데, 시 114편의 첫 절에 이러한 명칭이 유래되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 나올 때에” 유대인 전승에 따르면 애굽 할렐은 성전에서 유월절 의식의 부분으로서 사용되었다. 이 선집의 여러 시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담긴 그릇들이 수종하는 제사장에 의하여 제단 아래에 뿌려지기 위해 제사장의 대열을 오르내릴 때 불려졌다. 백성들은 소리로서 의식에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할렐루야를 외치며 시편의 어떤 구절들을 때때로 반복하였다. 시 119편은 22개의 소시편들을 모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시 120-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불리운다. 이것은 순례자들의 민속 노래이다. 시 145-150편은 최후의 장엄한 할렐루야 합창이다. 경건한 심령들은 시편 중의 시편 앞에 서게 된다.
 시편에 매겨진 절은 몇몇 본문들과 역본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히브리 본문, 흠정역, 개역 표준역 등에 매겨진 절들과 헬라 70인역, 라틴 벌게이트역, 영문 듀웨이역 등에 매겨진 절들을 특별히 비교 주시하여야 한다.
 영문 성경(흠정역, 개역 표준역, 기타)은 히브리 성경을 좇아 150장으로 이루어지며 70인역은 151장, 벌게이트역은 150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각 절이 다르게 표시되어 있다. 70인역과 벌게이트역은 시 9편과 10편을, 시 114편과 115편을 합쳤다. 그러나 116편은 두개의 시로 나누었는데, 1-9절, 10-19절을 각각 한 장으로 하였다. 147편의 경우에도 1-11절, 12-20절을 각각 한장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시 1-9편과 148-150편만 히브리, 헬라, 라틴 성경이 일치한다. 시 9, 10, 114-116, 147편의 경우에는 히브리 성경이 70인역과 벌게이트역보다 한 절씩 앞선다. 70인역이나 벌게이트역을 참조하면서 이런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한다. 장이나 절의 차이점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히브리, 흠정역, 개역표준역70인역, 벌게이트역, 듀웨이역
시 1-8시 1-8
9, 109
11-11310-112
114,115113
116:10-19115
117-146116-145
147:1-11146
147:12-20147
148-150148-150
 151(오직 70인역에만)


 더 나아가 히브리 성경의 경우에는 어떤 시의 제목이나 표제가 1절 전체, 혹은 그 일부를 이룬다. 그러므로 히브리 성경을 참조하고자 할 때는 약간의 주의를 요한다. 예를 들면 흠정역의 시 4:1은 히브리 성경에서 4:2이다. 표제를 1절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 성경은 4장의 경우 8절(흠정역)이 아닌 9절로 이루어져 있다.

 (3) 표제들
 시편의 표제들은 선집, 유형, 음악적인 가락, 연주 악기, 저자와 그 시기에 관한 사실등을 보여준다.
 ① 선집­다윗, 아삽, 아삽의 자손, 고라의 자손들 표제 주석은 150개의 시편 가운데 있는 작은 선집들을 일컫는 것처럼 보인다. 다윗 선집은 73개의 시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삽은12개 고라는 11개이다. 55개의 시편은 “영장으로 한 노래”란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람나세아크(Lamnasseach)이다. 공동 번역 성경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번역하였다. 이 선곡들은 찬양대 “감독자”에게 헌정되었거나 맡겨진 것 같다.(대하 2:2, 18; 34:13에 메나세아크가 “감독자”로 사용되었음을 참조) 람나세아크는 합 3:19에 “영장을 위하여,”“합창대 지휘자를 따라”(공동 번역)로 번역되었다.
 ② 유형­수 많은 시편에 나타나는 표제는 그 시편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가를 밝혀주는 것같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시: 히브리어로 미즈모르(mizmor)인데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57개의 시편에 이 단어가 등장하는데, 언제나 “다윗의”라든가, 다른 말을 함께 갖고 나타난다. 미즈몰은 “노래하다,” “찬양하다,” “악기를 연주하다”라는 의미의 자말에서 유래했다.70인역은 미즈모르을 프살모스(psalmos­“현악기를 탄주하다”라는 뜻의 프살레인(psallein)에서 기원)로 번역하였다.
  2) 노래­히브리어로 시르(shir)이다. 이 단어는 29개 시편의 표제에 나타난다. 시 18편의 표제에 등장하는 “노래”는 시르의 여성형인 시라(shirah)에서 온 것이다. 시 45편은 “사랑의 노래”라는 표제에 의하여 도입되고 있다. 시 120-134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란 표제가 붙어 있다.
  3) 믹담­히브리어의 믹담(miktam)을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여섯개의 시편에 나타난다(시 16, 56-60편).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어떤 학자는 “덮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카드어 카타무(katamu)에서 기원되어 속죄의 시편, 곧 죄를 덮는 일에 관계된 시편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단어는 아마 음악적인 명칭일 것이다.
 4) 마스길­히브리어의 마스길(maskil)을 음역한 것으로 “신중히 하다”라는 의미의 사칼(sakal)에서 파생하였다. 13개의 시편인 32, 42, 44, 45, 52-55, 74, 78, 88, 89, 142편에 나타나는 이 표제는 이들 시편이 교훈적이요, 지시적인 것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마스길은 시 47:7절에서 “지혜”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시편에 교훈이란 관념을 억지로 적용시킬 수 없으므로 마스길을 어떤 종류의 음악 연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5) 기도­히브리어로 테필라(tephillah)이다. 시 17, 86, 90, 102, 142편에 이 단어가 표제로 등장한다(합 3:1).
 6) 찬송­히브리어로 테힐라(tehillah)이다. 시 145편에 유일하게 표제로 등장한다. 남성 복수인 테힐림(tehillim)은 전 선곡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7) 식가욘­히브리어의 식가욘(shiggayon)이다. 시 7편에 표제로 나타난다(그 외에는 합 3:1에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그 의미는 모호하다. 거칠고 열정적인 성격을 띤 불규칙한 송시에 대하여 사용되었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히브리어 어근은 “방랑하다,””떠돌다,”“비틀거리다”의 사가(shagah)일 것이며, 자주 변하는 격렬한 리듬을 의미한다.
 8) 교훈­히브리어로 레람메드(lelammed). 시 60편에 나타나며 이 시편의 목적은 가르치는 것임을 나타낸다. 아마 레위인들은 백성들에게 이것을 가르칠 책임을 위임받은 것 같다.
 9) 기념케 하는 시­히브리어로 레하즈키르(lehazkir)이다. 시 38, 70편에 나타난다. “향을 드림”이라는 히브리어 아즈카라(azkarah)에서 파생했다. 어떤 이들은 제사드릴 때 이 일이 수행되는 시간에 부르기 위하여 지어진 시라고 추측한다. 대상 16:4절에서는 “칭송하며”로 번역되었다.
 10)감사의 시­히브리어로 레토다(lethodah)이다. 시 100편의 표제로 나타난다. 감사 희생을 드릴 때에 부르기 위한 시편 같다 (레 7:11-15). 시 100편은 감사의 시이다.
 ③ 멜로디­여러 구절의 표제에는 원래 그 시편에 잘 알려진 멜로디가 나타나 있다. 공중 예배를 위하여 대중적인 멜로디가 채용되었을 것이다.
 1) 뭇랍벤(시 9편)­의미는 모호하다. 어떤 히브리 사본들은 ‘뭇(muth)’앞에 “위에”(흠정역)로 번역되는 ‘알(al)’을 가져와 알뭇(almuth)이라 한다. 그러나 이 복합어도 설명할 수 없는 전문용어이다. 70인역은 이 복합어를 따라 ‘알뭇 랍벤(almuth labben)’이라고 번역하였다. 이 의미는 “아들의 감추어진 것들에 관하여”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어떤 음조의 명칭이거나 첫 구절들이며 “아들을 위하여 죽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소산님(시 45, 69편)­문자적으로 “백합화”인데, 멜로디의 명칭이거나 주요 단어일 것이다. 시 60편에는 “수산에돗” 곧 “증거의 백합화”가 시 80편에는 소산님에돗, 문자적으로 “증인의 백합화들”이 표제로 붙어 있다. 아마 이들 구절은 모든 동일하게 잘 알려져 있는 사랑의 곡조를 가리키는 것 같다.백합화는 팔레스틴의 “아네모네”이다. 에돗은 어떤 장소의 이름같다.
 3) 아얠렛샤할(시 22편)­문자적으로 “새벽 암사슴”이다(공동번역). 탈굼에 의하면 아침 제사 시간에 양을 드릴 때, 이 시편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이러한 관례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4) 요낫 엘렘 르호김(시 56편)­이 구절의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개역 표준역 성경은 본문의 엘렘을 알림으로 수정하여 “먼 느티나무 비둘기”로 번역하였다(공동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학자들은 시 55:6, 7로부터 인용했거나 언급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다윗의 방랑 세월이 암시되어 있다고 본다.
 5) 알다스헷(시 57-59, 75편)­“파괴하지 마소서”라는 의미이다. 사 65:8에서 부분적으로 인용된 포도 수확의 노래 중 첫 구절일 것이다.
  ④ 표제 중에는 시편을 노래할 때에 그 곡을 연주하는 관현악단의 악기들이 명시된 경우도 있다.
 1) 네기놋(시 4, 6, 54, 55, 67, 76편)­“현악기와 함께”라는 의미이다(개역 표준역). 시 61편에는 단수로 등장한다. 네기놋은 이사야 38:20과 합 3:19에 “수금”으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세 종류의 현악기를 갖고 있었다. - 하프(네벨), 리라(키놀), 찌터(아솔).
 2) 네힐롯(시 5편)­“피리에 맞추어” (공동 번역)라는 의미일 것이다.
 3) 스미닛(시 6, 12편)­의미가 모호하다. 흠정역의 어떤 판에는 “제팔음”이란 말이 난외에 기록되었어 있는데, 이 말이 옥타브를 의미한다면 히브리인들이 옥타브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무의미한 말이다. 대상 15:21에는 이 구절이 하프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요세푸스(Josephus)는 하프(네벨)가 8개의 현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공동 번역은 “팔현금”으로 번역하였다.
 4) 깃딧(시 8, 81, 84편)­그 정확한 의미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 음악 용어이다. 유대인 전승에 따르면 이것은 다윗이 갓(Gath)에서 가져온 하프를 의미한다고 한다.
  단어 형태상 “깃 사람들의 양식을 따라” 부르라는 말이다. 음악에서 이탈리아 풍,중국 풍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갓”-“포도즙 틀”이란 말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깃딧에 맞추어”란 말은 포도 수확의 멜로디를 가리키는 것이다.
 5) 알라못(시 46편)­의미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성들을 위한”(아퀼라와 제롬에 의하여 확립된 의미이다)이란 번역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전 봉사에서 여성들은 어떤 일도 감당하지 않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상 15:20에는 본 단어가 고대의 현악기들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리라의 뒤를 좇아 하프가 연주되도록 한 것 같다.
 6) 마할랏(시 53, 88편)­이 시편들의 풍기는 맛 때문에 구슬프게 부르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특별히 시 88편의 경우에는 전 시편을 걸쳐 가장 침울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⑤ 저자와 그 시기­시 14편의 표제에는 다윗과 관련된 짤막한 이야기나 그 환경이 묘사되어 있다(시 3, 7, 18, 30, 34, 51, 52, 54, 56, 57, 60, 63, 142편).
  ⑥ 셀라­히브리어의 셀라(selah)를 음역한 것이다. 시편에 71회 등장한다. 제1권에 17회, 제2권에 30회, 제3권에 20회, 제5권에 4회, 제4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150개의 시편 중에서 오로지 39개의 시편에만 등장한다. 그중 28개의 시편에는 “영장으로 한 노래”(“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공동 번역)란 표제가 부가되어 있다. 이 단어는 의미가 모호하며 이것이 지시하는 것에 대하여는 쉼표라든가, 간주곡이라든가, 멜로디의 변화, (“아멘”처럼) 강조 표시등으로 해석하여 왔다. 70인역은 이 용어를 디아프살마(“간주곡”)로 옮겼다. 이것은 그 시의 예전적 편집에 있어서 음악적인 주의를 뜻하는 것이다. 수 많은 추측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의미가 모호하다. “셀라”는 찬미가와 같은 성격을 특별하게 띠고 있는 시편들 안에 등장하는데, 그것도 대개는 사상적으로 한 묶음이 되는 소절의 끝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