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개론 “이 서론부에서는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함께 다룬다. 두 책은 전체적으로 하나이다.

 1. 표제
  히브리 성경 원전에는, 사무엘서나 열왕기, 또는 역대서와 마찬가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책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1448년 불가타역이 두 책으로 나눈 것이 처음으로 히브리 원전에 소개될 때까지였다. 원래 두 합본은 “에스라”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70인역에서 이것을 두 부분으로 나뉘어 제2에스드라스, 제3에스드라스라고 불리웠으며, 계시적인 제1에스드라스가 그 앞에 나왔는데, 그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두 정경의 발췌문을 포함한다. 제롬이 처음으로 두 정경의 이름을 “에스라”와 “느헤미야”라고 불러서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그는 70인역의 제1에스드라스를 제3에스드라스로 부르고, 그것을 계시의 책으로 분류했다.

 2. 저자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역대서의 역사적, 문학적 연속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문체와 언어의 연구는 이 책들이 아마 같은 저자에 의해서 씌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유대 전승(탈무드)에 의하면 에스라를 주요 저자로 말하고 있고, 느헤미야를 저작을 마친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
 비록 에스라-느헤미야 합본이 모두 에스라에 의해 씌어졌음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 의하여 씌어지지 않았을 것은 그 가운데 아무 것도 없다. 저자는 스룹바벨 시대와 자기 시대의 공적 자료를 이용했으며, 느헤미야에 의하여 기록된 보도들도 이용했다. 대명사를 1인칭에서 3인칭 단수로 바꾼 것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부분 내에서 다수의 저자가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변화는 또한 고대의 성경 외에 문서에서도 나타난다(스 7:28).
 느헤미야 12장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름들이 다양한 B.C. 400년 경으로 끝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서(느 12:10, 11, 22), 이 책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인, 그 기간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는 율법 학사였고(스 7:6),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거룩한 글들에 익숙하게 되기를 고대하였다(느 8:1-8). 그러한 사람이 후세대를 지도하고 교훈하기 위하여, 당대의 굉장한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전말을 보존하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기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를 쓴 영감된 저자로써 에스라를 보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일이다. 기록하는데 있어서 그는 가능한 공적 기록, 예를 들어 조서(스 1:2-4; 6:6-12), 편지(스 4:11-16; 5:7-17), 이름들(스 2:1-67)과 다른 자료들로부터 취사선택을 하는 일에 인도를 받았다.
 에스라의 두 부분이 아람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스 4:8-6:18; 7:12-26)은 과거에 에스라 시대보다도 휠씬 늦게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논증은 페르시아 제국에 아람어의 보급과 사용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이 알려졌을 때 제시된 것이었다. 페르시아 왕국의 각처에서 다량의 아람어 문서가 발견되고 애굽에서 많은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아람어 유대 문서가 발견된 이후로, 이러한 논증은 더 이상 근거가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문서들의 아람어와 에스라의 아람어 부분과는 굉장히 비슷한 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아람어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고, 조서와 지령등에도, 개인 서신이나 상용 또는 법적 문서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따라서 에스라와 같은 학자들은 두가지 언어를 다 알았고, 말하는 데 또는 기록하는 데 있어서 모국어와 아람어를 둘 다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상 아람어의 사용이 매우 널리 퍼져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람어를 알 정도였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저자는 읽는 사람들이 그의 아람어 부분을 이해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그로 하여금, 그가 사용한 아람어 자료를 히브리어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3. 역사적 배경
  에스더를 제외하고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일한 바벨론 포로 직후 시대의 책이며, 바벨론 직후 시대의 유대 역사에 있어서 예루살렘 중건으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이 두 책의 시대에 끊어지지 않는 계속된 장면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다만 그 중의 어떤 부분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가치있는 어떤 자료가 거의 없는 공백 부분들도 있다.
 에스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유대인들이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것과, 희생 봉사의 재확립과 성전 재건축의 시작등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이 약 2년 안에 이루어졌는데, 그때는 고레스의 통치 초기였다. 그 후 13년 동안 그 사업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진행되었다. 그리고는 성전 건축의 재개시와 그것의 완성, 그리고 다리오 Ⅰ세 하에서의 봉헌 등의 기사가 나온다. 그후 60년 정도의 기간에 대해서는 에스라는 아무것도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리고는 B.C. 457년에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유다로 다시 보내어졌는데, 모세의 율법을 따라 나라의 행정을 재조직하는 광범위한 권위를 가지고 보내어졌다. 그는 그의 귀환과 개혁에 대한 어떤 것들을 기록했지만, 역시 10년 이상의 기간을 연결시키지 않은 채 공백으로 남겨 놓았는데, 느헤미야가 지도자로 일하는 모습과 활동을 느헤미야라고 이름붙인 책에 기록해 놓은 때쯤은 10년 이상의 기간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묘사되어 있는 모든 사건은 페르시아 제국의 기간 중 전반기 동안에 일어난 것인데, 페르시아 제국은 B.C. 539년, 고레스의 승승장구하는 군대가 바벨론을 멸망시켰을 때부터, B.C. 331년 다리오 3세가 죽음으로 제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대신 알렉산더 대왕에게 넘겨질 때까지 존속하였다. 바벨론 포로 직후의 유대 역사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스 1:1) 시작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동쪽으로 이란의 사막 황야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소 아시아의 해변까지, 그리고 북쪽으로 알메니아의 고원으로부터 남쪽으로 애굽 변경까지 뻗쳐 있었다. 그 창건자인 고레스는 신중하고 자비로운 통치자였다. 바벨론에게 정복되었던 나라들을 유화시키는 정책과 함께, 그는 그들을 옛고향에 재정착하게 하고, 그들의 예배 장소를 복원시켰다. 이러한 너그러운 정책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고향땅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페르시아 왕들은 제국을 위하여 정직하게 일하고,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도록 훈계되었다. 조로아스터의 유일신 종교는 적어도 다리오 Ⅰ세때부터는 페르시아의 국교가 되었는데, 바벨론 사람들의 다신교와 우상 숭배 종교보다는 휠씬 높은 수준에 서 있었다.
  고레스가 바벨론을 쳤을 때, 그는 노년의 다니엘을 알게 되었고, 전시대의 느부갓네살 대왕의 신임받는 조언자를 또한 그의 조언자로 삼게 되었다. 다니엘을 통하여 고레스는 자신에 관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그의 지정된 역할(사 44:21-45:13)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회복을 승인하게 되었다. 그의 널리 뻗친 제국을 그 초기에 평온하게 하는 큰 사업은 왕의 온 정력을 쏟게 하였다. 바벨론 멸망으로부터 약 9년 간의 통치 끝에 그는 말 안듣는 동쪽 족속들을 다스려 출정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유다로 돌아와서 유대인들은 적대적인 이웃 나라들을 만났고 종족적, 종교적으로 혼합된 백성인 사마리아인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였다. 고레스가 그의 널리 뻗친 제국을 연합시키는데 바쁜 틈을 타서, 이러한 적들은 유대인을 훼방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어서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지체하게 하였다.
 고레스의 장남 캄비세스는 8년을 채 못되게 통치하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애굽을 정복한 일이다. 그가 유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는 것은 애굽에서 발견된 유대 문서에 의하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실질적으로 유대성전 재건을 도와 주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
 가짜 스메르디스의 짧은 통치는 유대인에게 큰 후퇴를 가져 왔다. 다리오에 의해 성전 파괴자라고 묘사된 이 왕 아래에서, 예루살렘의 사업은 중단되었다. 그 중단은 얼마만큼은 사마리아의 원수들 때문이기도 했는데, 사업을 재착수하도록 허락한 다리오Ⅰ세의 강력한 정부 아래에서 안정된 조건이 주어지자마자 새로운 기초를 놓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리오 대왕의 시대는 번영과 질서로 특징 지어졌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그의 현명하고 강력한 통치로 인하여 유익을 얻었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영적 지도력 하에서, 그들은 성전 건축을 마치고, 다리오 치세 6년째인 B.C. 515년에 성전을 봉헌하였다.
  그러나 다리오가 그의 치세 후기에 헬라를 치려고 결정하자 불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때로부터 제국은 헬라와 애굽과 다른 곳에서 계속적인 반역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제국 내의 평화와 안정은 깨어지게 되었다. 그 다음의 두 왕들, 크세르크세스와 아닥사스다 1세는 모두 약하였고, 기회주의자들이었으며 성격이 불안정하여,힘센 참모들의 강력한 손에 의하여 권좌를 유지하였다. 헬라에서의 참패들과 애굽의 반역들과 다른 지역에서의 반역 등으로 제국은 큰 불안정으로 빠져 들었고, 국내외 정책에 있어서 흔들리게 되었다.
 에스라가 유대인을 위한 주거류지를 얻어낸 것은 애굽에서 심각한 반역이 일어났을 때(463-454 B.C.)였는데,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아닥사스다에게는 유대인의 선의가 필요했으니, 그것은 유다가 애굽으로 가는 지름길에 직각으로 가로 놓여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유다가 속해 있는 총독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B.C. 450년 이후), 아닥사스다는 분명히 그릇된 판단에 의하여 충성되다고 생각되어진 사마리아를 도와 주었는데, 그것은 유대인도 반역에 가담할까 두려워서였다. 따라서 아닥사스다는 사마리아로 하여금, 이미 얼마동안 지어져 있던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짓지 못하게 하는 권한을 주었다. 총독의 지휘가 정비되었을 때, 믿음직한 유대 제사장인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 왕으로부터 임명을 얻는 데 성공했고, 성벽을 재건하기를 완성했다. 이러한 것을 그는 계속되는 폭동의 위협 아래에서 해내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총독으로 일했으며, 능력있는 행정자요, 종교 지도자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비교적 안정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기초를 놓았는데, 그것은 다음의 거친 시대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4. 주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대인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데, 그것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영원한 목적과 협력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하나의 나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증명하게 되었다. 더우기이러한 기록은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여주며, 다니엘서 8, 9장의 예언들이 역사적 사실에 완전하게 부합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근원 자료를 제공해 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일련의 교훈적 예화들을 통하여, 어떻게 소수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실하며, 이기심 없고, 두려움 없이 굳은 지도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사업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들은 많은 교훈과 실수 없는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믿도록 고양시키는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5. 개요
Ⅰ. 느헤미야의 유다 총독으로의 첫 임기 1:1-12:47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1:1-2:11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서 들음 1:1-4
      (2) 느헤미야의 기도 1:5-11
      (3) 아닥사스다가 느헤미야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요청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받아들임 2:1-8
      (4) 느헤미야의 도착, 어려움의 첫번째 암시 2:9-11

     2. 성벽의 재건 2:12-6:19
      (1) 느헤미야가 밤에 벽을 돌아봄 2:12-16
      (2) 역사에 대한 호소가 지지와 반대를 받음 2:17-20
      (3) 42개 건축 조를 나눔 3:1-32
      (4) 느헤미야의 역사를 중단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실패함 4:1-23
      (5) 느헤미야의 총독 첫 임기 동안 사회개혁이 이루어짐 5:1-19
      (6) 건축을 중단시키기 위한 또 다른 시도들, 성벽의 완성 6:1-19

     3.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인구 조성을 계획하다 7:1-73
      (1) 도시 정책의 계획 7:1-3
      (2) 예루살렘 인구 조성을 위해 느헤미야가 인구 조사 준비를 계획함 7: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