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마24:37-41). 종말신앙의 첫 걸음은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몸을 흠없이 보존하는 일이다. 


영, 혼, 몸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세 가지의 기능이 하나로 된 존재이다.  죄가 들어오자 사단은 하나를 두개로, 일원론을 이원론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랑을 미움으로 평화를 전쟁으로 행복을 불행으로 만들었으며 생명을 사망으로 만들었다. 사단은 우리 몸과 혼도 분리시켜 놓았다.


사단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곳(영)을 귀신과 교통하는 곳으로 만들어, 이것으로 사람을 괴롭힌다.

우리 안에도 두 명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 보이는 나와 보이지 않는 나.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지만,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주위를살피게 되고,  아무도 없는데도 내 행동은 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나를 감독하고 있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보이는 나가 보이지 않는 나를 변호하기 위해 생기는 것이다. 

사망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동시에 내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죄를 짓지 않고 싶은 내가 있고, 죄를 짓는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것과 매일같이 투쟁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특히 한국인은 주변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훨씬 더 많이 받는다.

한국사람은 시키는대로 안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데도 깡다구나 고집으로 믿기 위해 애쓰다보니, 여기저기에 부작용이 생긴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영적인 존재로 설계되었고,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영적인 지배를 받고있다.


하나님도 영이시지만, 사단도 영적인 존재이다. 하나님께서“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든”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요4:24). 성경은 영이 죽어있으면 살아있으나 죽은 자가 되고, 영이 살아있으면 죽었으나 산 자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동물은  혼과 몸이 하나로 되어 있다. 동물에게도 지적인 수준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훈련하면 따라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신과 교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지 않으면 동물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성경은 몸과 혼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몸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무익하고(요6:63), 흙으로 돌아간다. 혼은 “하나님의 생기”로 산 영혼이 되었으니, 범죄한  혼은 죽”(겔18:20)고, 그 생기(숨, 호흡)는 주신이에게로 돌아간다(전12:7).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된다(시146:4).


살리는 것은 영이요”(요6:63), 영은 생명이다. 영이 병들면 마음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면 몸도 병든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둘로 나눌 수 없다. 영적 생명과 생물학적 생명이 같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할때 생명이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 사람이 부활하면 따로따로 부활하지 않고, 영과 혼과 몸이 같이 부활한다.

우리의 몸도 삼위일체의 몸이다.


몸은 몸이고, 혼은 혼이다라는 헬라 이원론 사상이 기독교까지 뿌리를 내려, 오늘날 기독교에는 히브리사상과 헬라사상 이 두개가 공존하고 있다. 하나님도 분리시키고, 사람의 몸도 분리시켜 몸 따로 혼 따로, 말 따로, 행동 따로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다. 사람이 병이 나면 누구에게로 찾아가야 하냐를 놓고 재림교인들도 헷갈리고 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는가?  병이 나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당연히 병원에 가야지, 이것이 과학적인 개념인가 아니면 성경적인 개념인가? 성경이 진리라면  실제로 과학으로도 맞아야 한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20). 


어떤 말씀은 믿고 어떤 말씀은 믿지 않고, 우리가 그렇게 신앙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마치 모순되고, 이중 인격자로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들도 독감걸리면 병원을 찾아가는데, 감기하나도 못 고치는 하나님이, 어떻게 암을 고칠 수가 있겠어요? 요새 현대의학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의사가 못고치는 병을 어떻게 하나님이 고친답디까?  요새는 기술이 좋아서 병도 미리 찾고, 성형도 기가막히게 한다니까요!


성경은 이론이지, 거기에 좋은 말이 써져있으니까 믿는거지, 요새 문자그대로 믿는 사람이 어딨어요? 목사들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도 영혼을 치료하는 것은 제사장의 몫이고, 몸을 치료하는 것은 의사의 몫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도 되지만 왕도 된다. 이스라엘 당시에는 제사장이 병도 고쳤다. 그가 우리를 택하신 것은 그의 이름을 선전하기 위함이다. 현대의학이 발전한 것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고, 그것이 인간에게 필요하심을 아시고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렘17:9).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먹으라는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을 아시고, 현대의학이라는 대비책을 만들어 놓으셨다. 현대의학이  필요한 사람은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다.

지금도 그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자이시다. 


의사는 영을 다룰 수 없다. 진짜 의사는 영을 고칠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이다.

성경은 육체는 무익하다고 하였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수술로, 약으로 고쳐주고, 대신 어마어마한 돈을 챙긴다. 

그 환자는 과연 나음을 입은 것일까. 의사는 그 환자를 고쳐주었는가? 의사가 수술을 잘해서 그 환자는 지금도 살아있다.


그러면 산자가 되고, 생명을 얻었는가? 말씀이 아닌, 도구를 사용해서 비싼 기계로 고장난 몸을 뜯고, 조립하고, 망치로 두들기는 것은 기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의학 기술'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사람을 처음창조하신 생명으로 보신다. 생명은 생명을 낳는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병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다.  성경은 만드신이가 고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환자들은 의사의 기술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 아님을 알고 있다. 참된 의사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우리가 관리하도록  자연법칙을 주셨다. 자연법칙을 어기고,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치료할 수 없다. 질병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므로 초래되었기 때문에 순종을 통해서 건강이 회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법칙은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건강기별’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재림때까지 거룩하게 흠없이 보존시키기 위해서 주셨다. 노아때처럼 마지막 시대에도 음식이 타락하고 변질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는 건강기별이 복음전파와 분리되고, 복음사업과 의료사업이 분리되면,

바벨론 교육이 우리를 지배할 것을 아셨다.


재림교회가 갖고 있는 건강기별은 약초기별, 효소기별, 현미기별이 아니다.  건강기별이 복음의 오른팔이라고 표현한 것은 중요할뿐만 아니라,  그것은 도구가 아닌, 우리 몸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기별은 남은 교회의 증거이다. 개신교회가 아무리 많아도 성소의 마지막 정결사업을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성소의 마지막 정결은 하늘 성소의 정결과 함께 우리 몸 성소도 함께 정결함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젊은 세대들이 꼭 이루어야 할 첫번째 과제이다. 예수님께서 지성소에서 최종적으로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중보하시고 계신다. ‘죄의 도말’은 ‘치유’의 기별, 건강기별의 한 부분이다. 


재림전 심판과 건강기별은 짝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로 생긴것이므로 죄의 도말만이 성전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지성소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심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과 같고, 그것은 죄의 도말을 의미한다. 건강기별이 마지막 시대에 주어진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죄의 용서와 죄의 도말은 다르다. 용서는 매일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고, 죄의 도말은 매년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죄의 용서는 일년 내내 성소의 봉사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그러나 죄의 도말은 대속죄일에 한 번 단행되는 최종적인 죄의 용서이다.


죄의 도말은 하나님께서 하늘 죄책에서 우리의 죄의 기록들을 지우실때 죄의 기억을 함께 지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용서는 받았으나 여전히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들 때문에 상처가 남아 있다.

그  죄의 기억들때문에 구원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죄의 도말이 필요한 것이다.


죄가 기억속에서 도말되고, 하늘의 기록책에서 도말되면 하늘 성소가 정결케 된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더이상 죄를 회개할 수 없다. 이미 죄가 도말되었다.

심판이 끝났기 때문에 재림하신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재림을 심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재림이 아니라, 태평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하는 지금을 두려워해야 한다. 지금 하늘에서 심판이 펼쳐지고 있다. 기독교의 잘못된 심판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엉터리로 살고 있다.


우리 젊은 세대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과거에 내가 지은죄를 반복해서 짓고, 또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죄짓는 일반교회에서 행하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라오디게아의 회개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라오디게아의 회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죄이다. 이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 죄가 내가 지은 죄중에 가장 큰 죄이다. 대부분 진짜 회개할 죄는 일생중 한번도 깊이 생각한 적도, 회개한 적도 없다.


과거에 내가 지은죄, 똑같은 그 죄를 반복하면서 계속 그 죄를 회개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회개가 어떤 회개인지  다음에 더 자세히 알아보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하나님의 영적에너지가 물리적 에너지를 지배한다라고 하는 건강기별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의 몸에 피와 살과 뼈를 만들뿐 아니라,  그 에너지로 활동하고 숨을 쉰다. 이 에너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29 음식을 말씀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1:29).  우리에게 주신 음식은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와 나무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 식품이다. 

하나님이 우리 먹거리를 말씀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지 않는 먹거리는 생명이 없다.

백날 배부르게 먹어봐야  유전자는 반응하지 않는다. 몸에 독소를 남긴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식물이 되리라" 하셨을때 이미 우리 유전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문자그대로 기억하고 있다.

마치 바다와 그 생물들을 창조하신 주께서"바다야 잔잔하라"하실때 바다가 그 창조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반응하였듯이....우리 몸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자연법칙을 따른다. 그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몸안의 DNA가 망가진다.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법칙이다. 


천연의 법칙은 선을 위해 고안해 주신 것이다.  멸망의 문은 넓고,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천연의 길도 충분히 넓어서 누구라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과거에는 유대인의 습관이 있었던 것처럼, 현대에는 재림의 습관이 필요하다. 치료의 능력은 믿음이고, 구원하는 믿음도 일종의 거래이다. 두 개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이다.

144.000인은 창세기 1:29절 먹거리로 돌아가야 한다.


치료봉사에는 “식사습관이 우리몸의 건강, 성품,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육체와 도덕적인 본성 사이에는 밀접한 교감작용이 있는데, 식생활과 영성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건강개혁은 예수님 재림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위대한 사업의 한 분야이며 이  증거가 부족하므로 세상은 멸망하여 가고 있다”고 기록한다.


우리 기별에는 세상이  처음들어 보는 모든 기별이 있다.  우리는 의사가 병을 안내해 주듯이, 하늘 가는 바른 길을 안내해 주는 섞이지 않는 기별이어야 한다. 우리는 낯선 종교와 사람과 차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잃어가고 있고, 빼앗기고 있다. 젊은 세대가 그것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여자에게 “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어보았다. 사단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고 속였다(창3:1).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가자 그 실과를 따 먹고”(창3:4-6). 정말 선악과를 먹자마자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창3:7).

사람의 몸을 관찰해 보면 머리쪽에 대부분의 구멍들이 몰려있다. 눈, 코, 입, 귀에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 


이 구멍에서 모든 죄악의 독소가 들어온다. 몸 아래쪽에 있는구멍은 독소가 빠져 나가는 구멍이다.  전두엽에서 가장 가까운 구멍은 눈이다. 이마 앞에 있는 뇌를 전두엽이라고 부른다.  이마 옆(frontal  Labe)에 있는 전두엽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송신탑이다. 이곳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조정하고,  전달하고, 또  이웃세포와도  연결되어 있다. 


전두엽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중심부가 전두엽이다. 전두엽은 방들로 채워져 있다. 이  방에서 선과악이 서로 자기 방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영적으로 방들을 채우지 않으면 사망파 신호가 시그널을 잡아 차지하게 된다. 이 전두엽 바로 아래 눈구멍이 있다. 


눈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어 눈을 속일수가 없다. 입은 아무리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눈을 보면 나를 미워하는 것이 보인다. 입술은 진리를 말하지만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 하와가 선악과를 눈으로 본즉 먹음직도하고 보암직"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


눈은 모든 선과 악이 들어오는 첫번째 통로이다.  이 첫번째 통로인 눈을 잘 지켜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 달라진 것은 그들의 눈이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벌거벗은 줄을 알게”되었다.

모든 정보는 눈으로 들어온다. 눈 바로 가까이에 귓구멍이 있다.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은 귀가 듣는다. 시청각 자극이 뇌로 들어올 때 시각은 눈을 거쳐 후두엽으로 전달되고 청각은 귀를 거쳐 측두엽으로 전달되고 시청각은 전두엽으로 전달한다. 소리가 귓속에 들어가 고막을 진동시키면 고막은 뇌에다 신호를 보내고,  뇌에서는 그 신호를 전파로 바꾼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몸의 모든 길은 뇌로 통한다. 종종 귀에서 소리 나는 증세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남편도 귀 한쪽에서 2년전부터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처음 귀에서 사이렌 소리가 난다고 할때 웃으웠다. 하나님께서 경고 사이렌을 하시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나도 가끔씩 귀에서 둥둥 북소리가 들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명이라고 부르는 이 병은 오랫동안 식욕과 정욕의 방종과 여러 형태의 과로와 무질서한 생활에서 지력을 낭비하고 소진하여 뇌신경이 자기 상태를 탄식하며 우는 소리이다.


귀 가까운 곳에 콧구멍이 있다. 귀에서도 독소가 생기지만 코에서도 독소가 생긴다.

나쁜 공기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가정과 교회, 직장과 학교에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나쁜 독소가있다.

그것이 공기를 오염시키고 우리 몸에 독소를  형성한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독소가 가장 더럽다. 화학물질만 환경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독소도 깨끗한 공기와 환경을 오염을 시킬 수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것은 원수가 사랑스럽다기 보다는 원수를 미워하면 우리 몸 안에서 독소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화가 날때 침을 쥐 목속에 넣으면 쥐가 몇 분안에 죽는다. 아주 독한 아드레날린 물질이다.

우리 몸도 전파로 되어있다. 물은 우리 몸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혈액안에 가장 많은 수분이 들어있다.지구에도 물이 70%이다. 과일과 야채안에도 수분이 70%이다. 나무, 꽃, 땅도 물이 들어있다.


사람이 마음에서, 독소를 품으면 물의 입자가 바뀌고, 따라서 그 나쁜 파장이 음식과 땅과 우리 몸에 독을 뿌린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리라”(창4:7-10)하셨다.

콧 구멍 바로 아래 입구멍이 있다.  입구멍은 한개 밖에 없지만 가장 큰 구멍이다.


음식을 씹고, 사람을 씹고, 삼킬 수있는 모든 일은 입을 통해서 한다. 마음에 있는 것이 말로 나온다. 입에서 마루리만 잘해도 죄의 절반이 감소될 수 있다.  이 일곱개의 구멍에서  우리의 식습관과 생활습관이 결정된다.

다니엘의 모본은 청년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기별이다. 알지 못했을때에는 하나님께서 간과하신다. 백치에게는 책임이 없다.


개혁은 기본적 진리를 분명히 깨닫는 곳에서 출발하고,  육체는 반드시 의지의 지배를 받고, 의지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 자유를 선포하는 것은  율법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잘 훈련하고 교육시켜서 자기의 감화력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지혜와 능력의 탁월함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변질되었고, 어떻게 식습관을 회복해야 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 창조하신 후에 아담에게 가장 먼저 교육하신 것이 창세기 1:29절 먹는음식이었다. 

종말신앙과 음식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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