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소망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야곱은 그 축복을 받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다.  그 축복을 받기위해서 한 평생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 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죽도록 고생만 하였다.


부모와 형제가 있지만 도망가는 신세가 되어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는 야곱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칠년동안 열심히 수고하지만, 그 뒷날 엉뚱한 여자에게 첫 정을 바치고,  다시 칠년을 엄청난 고생끝에 사랑하는 라헬을 얻게 되었다.

야곱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탐한  외삼촌에게 더이상 이용당하기 싫어 자기의 모든 소유물과 가족들을 외삼촌 집에서 탈출시켜 고향으로 가는 길목 압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까지  꺾어보려고 노력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나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이 옷자락을 놓치 않겠다.” 고 씨름을 하였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인생 좀 제발 끝내게 해 달라” 내가 이  축복을 받지 않을 봐에야  차라리 죽게해 달라”고 젖먹는 힘까지 쏟아붇는다(창32:22-32). 야곱은 천사와 씨름끝에  환도뼈가 부러졌다.


우리 몸 중에서도 가장 튼튼한 뼈가 환도뼈이다. 이제 더이상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너가 나와 겨누어 이겼다”라고 하신다. 분명 씨름에서 야곱은 졌고,  천사가 이겼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이 이겼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그곳에서 야곱의 이름이 바뀌고, 야곱의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졌던 그 날, 이제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달았던 그날,

하나님께서 그제서야  “나와 겨누어 이겼다” 라고 이야기 하셨다는 것이다.
야곱의 환도뼈 부러지는 경험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우리는 야곱보다 훨씬 정직한 자가 아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에 욕심을 바라고 속였지만, 우리는 이 세상의 축복에 욕심을 내고 하나님을 속인 사람들이다.

어떻게 아버지 임종하시기 전에  가짜 털을 붙이고 목소리까지 변장해 가면서 에서의 축북을 가로채기 위해서 천연덕스럽게 아버지를 속이는 자가 하늘의 기업이 될 수있을까.

에서는 야곱보다 훨씬 남자답고, 양심적인  효자였다.  에서는 모태신앙인 동시에 믿음의 후사인 장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태신앙에 대해서 감격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았다.  당연하게 여겼다.


에서는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이신 부모님 밑에서 자라, 자기도 이 정도면  괜찮은 크리스천이라는 영적인 자만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죄와 인생의 풍파를 겪으면서 죄인임을 깨닫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기 의를 자랑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거져 주신 의와 구원을 크게 감격하고, 변화할 사람이었다. 

야곱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또 ‘야곱의 환난’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던지는 것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갖가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산들을 넘었다. 내가 계획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삶들이 내 삶이 되었다.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삶,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삶을 살면서 결국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 알게 되었다.  사실 나이 먹어서 알아야 하는데, 너무 이른 나이에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 또래들은   가족들의 도움과  보호를 받고 자랄 때,  나는  혼자의 힘으로 내 인생의 삶의 방법을 터득하여야 하였고,

어려운 난관을 스스로 헤처나가야 하였다. 아버지는 나를 낳기도 전에 엄마의 곁을 벌써 떠난 상태였다. 나는 친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나는 새 아버지와 네 명의 이붓 동생들 사이에서 자랐다. 

나는 그들과 차별된 삶을 살았고, 야곱처럼 가족이 있었지만 가족의 공동체와 거리가 멀었다. 


그런 환경이 결국 나를 일찍 복음으로 밀어넣었다. 너무 일찍 환도뼈가 부러졌다. 새 아버지를 만나 야곱처럼  이름도 바뀌었다.  지금의 내 이름이 그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새 이름위에 축복하셨다. 나는 하나님을 친 아버지처럼 의지하는 버릇이 일찍 생겼다. 아버지가 없으니 내가 유일하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누군가 인생을 바꾸라고 한다면 나는 안 바꾸고 싶다. 야곱은 에서와  엄마의 배 안에서부터 인생을 바꾸기 위해 싸웠다.

오직이나 바꾸고 싶었으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겠는가. 만일 야곱이 먼저 태어났더라면 에서가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인생의 광야가 있다. 인생의 광야를 일찍, 혹은 늦게 경험하느냐의 차이 일뿐이다.


환도뼈가 부러진 날 야곱이 깨어났듯이, 마지막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빨리 경험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 힘으로 할수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깨어나지 못한다. 마귀가 만들어 놓은 오늘날의 교육시스템 목적이 자아성찰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신앙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라고 교육시킨다. 

교회는 자아를 높여주고, 세워주는 쪽으로 잔뜩 기울어져 있다. 


오늘날 20대 청년들이 가장 많이 보는 책이 ‘자기개발’이라는 책이다. 내 힘으로, 내 스펙으로 할 수있다. 내 부모의 백그라운드로 할 수 있다.내 재능으로 할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고 하는 자기암시, 자기 체면을 통해서 긍정적인 사고와 같은 책들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세뇌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믿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믿기가 참 힐들ㄷ 믿지 않는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그리스도가 하지 못하게 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중심의 인본주의와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를 잘 구분해야 될 시대이다. 우리에게는 인격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충분히  단 한 방이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수 있으셨다. 

그런데도  지긋지긋하게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탈출 시키셨다.


어렸을때  열가지 애굽재앙을 놓고 하나님께서 매직 쇼를 하시는 것처럼,  갑자기 메뚜기 떼가 확 나타나고,  물이 갑자기 피가 되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은 나쁜 요술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의지하였던 것들이 그들을 멸망시키게 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던 그 무언가를 하나씩 잃어가고 있을 때, 정신적인 붕괴가 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나한테 안정감을 제공해 주지 못한 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때에,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믿고 있는 직장과 사업이 내 가정의 울타리를 지켜주고, 내삶이 유지되고, 우리 가족의 안정이 유지된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이 없어지면 위기가 시작된다. 남편과 자식을 믿는다.
그런데 더이상 그 남편과 자식이 안정감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재산과 연금을 믿는다. 
그런데 어느날 그것들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정신적인 쇼크가 오고, 근심이 시작된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뭔가가 떠나면 멘탈이 붕괴된다.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으로 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우리를 출애굽하여 하늘 가나안으로 갈 수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없었던 고백은 바로 십자가의 길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이제 너는 너의 모든 의미와 욕심을 포기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네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너는 나의 모습으로 살고, 사람들은 너를 통해 나를 만날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원치 않는 곳으로 밀어넣는다.


그 복음은 나의 본성을 거스르기도 하고, 내 야망과 욕심을 거스르기도 하고, 내 판단과 기준밖에서 나를 부르기도 한다.

그것을 복음으로 인정할 때 순종할 수 밖에 없다. 복음은 안정된 삶이 아닌 의미있는 삶을 선택하게 하고, 울타리 안에 있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울타리 밖에 있는 죽어가는 생명들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새로운 영역이 있다.


그 이전에는 선한 일도 하고,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적절한 품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도 일단 깨어나기 시작하면 야곱이 된다. 결국 진리 속의 진리의 진실이 진리가 될 것이고, 진리 밖의 진실은 진리가 아니다었다는 것을 안다. 


65세가 되던 해에 에녹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므두셀라이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노아의 아버지이다. 므두셀라의  이름 속에는 그가 죽으면 마을에 심판이 임한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에녹이 므두셀라라는이름을 받고 나서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였다. 

에녹은 자기 시대에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겠구나를 깨달았다. 


에녹은 자기 아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가 죽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그 시기를 분별하였다.

에녹의  3대째에 노아홍수가 일어나 세상이 물로 멸망하였다. 에녹은  3대를 깨워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시켰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성령을 통해서  더이상 내가 세상을 사랑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믿음으로  깨어날 수 있다.


므두셀라는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노아 홍수 바로 전에  969세에 잠들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일어났다. 우리는 여전히 야곱처럼 “나를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씨름을 하느라 내 환도뼈가 부러질때 까지 그것을 놓치 않는다.


어느 순간 내 환도뼈가 부러지기 시작할 때 내 자신이 영적인 불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너가 나와 겨누어 이겼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순간이 내가 변화되는 순간이며 내 이름이 바뀌는 순간이다. 내 환도뼈가 부러지는 순간 야곱의 환난도 통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