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즈키 목사님을 보내며 - 추도예배 조사


(2014년 7월 13일, 오후 1:30 - 3:30 코후다이 삼육초등학교 강당)


북아시아태평양지회 세계선교부 권정행


지회장 이재룡 목사님께서는 지난 주에 스위스로 출장을 떠나시면서 제게 특별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여읜 수즈키 사요코 사모님, 존경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은 유가족들에게 그리고 큰 영적 지도자를 잃은 일본연합회장 시마다 목사님을 비롯한 일본교회에 북아시아태평양지회를 대표하여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위로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7년 동안 PMM을 섬기며 일본에서 수고하던 PMM 선교사들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선교사들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제가 수즈키 시게하루 목사님 내외분보다 한 발 늦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방문하는 모든 선교사 가정에서 수즈키 사과를 먹고 수즈키 채소를 먹었으며, 수즈키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손수 밭에서 농사를 지으셔서 채소를 PMM 선교사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청과상 앞을 지나다가 맛있는 과일을 보면 당신은 못잡수셔도 선교사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일본에서 수고했던 모든 PMM 선교사들은 목사님의 직접적인 헌신과 가족과 성도님들에게 끼친 감화력을 통해서 수즈키 목사님께서 선물하신 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첫번째 자동차는 큰 아드님을 통해서, 어떤 경우에는 사모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모아두셨던 비상금으로 자동차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목사님께서는 당신의 장례를 위한 비용을 마련해두셨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차량을 제공하기 위해서 장례를 위해 준비해놓았던 저축을 사용하셨습니다. 목사님 내외분의 사랑을 많이 받은 PMM 선교사들이 며칠 전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세 명이,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한국에서 세 명의 PMM 선교사들이 찾아와 목사님의 사랑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저는 자동차를 스물한대나 기증한 분이셔서 수즈키 자동차 집안의 일원이신가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제 아내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수즈키 목사님 댁을 방문했을 때 의자를 보고 놀랐습니다. 식탁 주위에 있는 네개의 의자들 가운데 같은 종류의 의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의자가 하나가 모자랐습니다. 함석 물통을 가져다 엎어놓으시더니 그 위에 방석을 깔고 앉으시며, "이게 내 전용 의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날 지회의 아침 예배시간에 수즈키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을 때 필리핀에서 온 나이 어린 골든에인절스 단원 한 자매가 자기도 그분을 안다고 했습니다. 수즈키 목사님은 하루에 두끼만 잡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두끼만 잡수시고 한끼의 식비를 절약하여 필리핀에 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셔서 배우게 하고, 기숙사와 도서관을 지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사랑을 입으로 외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수즈키 목사님은 생활로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상당히 많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드리고도 남아있는 것이 많이 있는 사람이지만, 수즈키 목사님께서는 갖고 계신 모든 것을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드리시고,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는 유체(遺體)마져 치바의과대학병원에 의대생들을 위한 교육용으로 기증하고 가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두 드리고 하나도 남은 남은 게 없는 분이십니다.


한국인들은 원수를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미운 원수라도 미안하다라는 사과 한 마디로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 번 입은 은혜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인들은 두 분의 일본인 목사님들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한 분은 110년 전에 한국인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해주신 쿠니야 히데 목사님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수즈키 시게하루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의 지친 육신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일본 땅에 묻혀 계시지만, 목사님께서 남기신 목회자로서의 모본과 그리스도인의 따뜻한 사랑은 스물 한 가정 PMM 선교사 가족들과 한국인 성도님들의 가슴에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살아 있을 것입니다.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시마다 목사님을 비롯한 일본 교회 성도 여러분, 사도께서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닙니다. 공중에서 마지막 나팔 소리가 들리는 날, 천사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티끌 가운데서 자는 성도들을 호명하시는 날, 우리의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목사님, 주님의 음성을 아는고로 그분께서 인도하시는대로 평생 따른 주님을 따른 우리 주님의 귀한 양 수즈키 목사님은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 날을 마음에 고대하며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함으로 주님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런 그날, 사랑하는 수즈키 목사님을 속히 뵙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수즈키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후 7명의 PMM 선교사들이 추도예배를 비롯해 목사님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일본으로 파송된 전체 PMM 선교사들의 1/3이나 되는 많은 분들이 적지않은 항공료를 지불하고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분들이 보여준 따뜻한 위로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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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즈키 시게하루 목사의 약력

남편은 1927 5 8일 후쿠오카현 쿠루메(久留米)에서 3대째 재림교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야마가타 목사님 댁에서 하는 어린이반 프로그램에 출석하여 타케코 선생님, 토시오 선생님, 겐지 선생님과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성장 후, 명선학교에서 공부하고 해군의 요카렌에 입대했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할머니의 가르치심이 있었고 십계명이 적힌 인쇄물을 쥐어주신 어머님의 소원을 꼭 지키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특공대원으로 출격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할머니, 어머니의 가르치심을 계속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1946 6 6일 무사히 조국에 돌아와 일본 치바에 있는 삼육대학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야마가타 토시오 목사님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 전쟁이 끝나고 재개된 복음사(일본의 시조사)에서 일하면서 교인전도사로서 교회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1952 11 2, 청년회 전도에서 교인이 된 하치스카사요코와 결혼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세 명의 아들 딸들을 주셨습니다.

1973년부터 히로시마 삼육고등학교에서 일하며 기숙사에서 사감으로 일했습니다. 그 후, 서일본교구의 목사로서 일하고, 오키나와 삼육중학교에서는 기숙사사감도 겸임했습니다. 설교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가 가장 큰 주제였습니다. 마지막 15년간은 코후다이교회 일원으로서 동년배의 좋은 친구를 만나고 젊은 청년들과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또한 필리핀에 있는 레이테섬의 SDA학교, 한국에서 선교사로 파견되어 온 PMM 목사님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서포터가 되는 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랐습니다. 히로시마 삼육고등학교의 남기숙사(도호 기숙사)에서 침식을 같이 한 옛날 학생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직접 만나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없는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아들, , 손자손녀들의 자상하고 깊은 배려 속에서 잘 지내다가 올해 6 22일 급성폐렴으로 잠드셨습니다. 향년 87세입니다.


시신을 기증하라는 유언에 따라, 돌아가신 날에 가족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 후 시신을 치바대학교(千葉大學)의학부로 모셨습니다.

괴로운 산소마스크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Lets go!”였습니다. 그것은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여 다 같이 하늘나라에 가자는 격려의 말로 들렸습니다.


아내 스즈키사요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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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장례식장에서 배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장례식(혹은 추도예배)에 꽃을 보낸 분들의 명단을 입구에 게시하고 화환에는 이름을 따로 적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분들이 미리 꽃을 꽂아 놓고 꽂을 보낸 분들의 이름은 따로 게시를 함으로 꽃을 보낸 분들의 숫자가 증가해도 꽃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니므로 낭비를 줄일 수 있으며, 유가족들은 장례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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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즈키 시게하루 목사님과 가깝게 지내셨던 김석만 목사님 가족을 대표하여 이명희 사모님께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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