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일>


한여름 담뱃잎은 그 크고 풍성한 몸체를 축축 늘여뜨리고
뙤약볕 아랑곳하지 않고 뻣뻣하게 서있다.
어쩌다 불어오는 산바람에도 아주 조금씩만
거만하게 허느적거려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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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담배밭 고랑사이를 걸어 보았는가?
텁텁하면서도 넓적한 잎은 싫다는 사람들의
목덜미를 치근치근 감아 온다.
 

그러나 그 콧대높은 잎도 낫으로 툭툭 자르기만하면
거만한 자존심을 금방 누그러뜨리고 말없이
땅바닥에 슬며시 내려 앉는다.
금방 시집와서 동네 사람들 대하기가 부끄러운 새색시처럼 입가리고 고개마저 다소곳하게 숙인다.
 

바람한점 없는 외진 산비탈길을 땀 뻘뻘 흘리며
허덕허덕 담배를 한짐지고 내려오노라면 조금만
덜 꺾어 지게에 올렸더라면 이렇게 허리가 휘어지지는 않을텐데 하는 마음이 저절로 인다. 
 

"후유-"
고개 중간 쯤에서 지게를 고여 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양쪽 소매말기에 닦고
담뱃잎을 올려다보면 시퍼런 몸의 담뱃잎들이
미안한 듯 죄다 얼굴을 붉으레 물들이고들 있다.
(지게위에  새색시를 올려놓고 지고 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베잠방이 사이로 허연 속살이 다 드러나도
그다지 흉이 되지 않는 한여름,  
감나무 그늘 아래에는 담뱃일이 한창 널부러져 있다. 
새끼줄에 담배를 엮는 아낙네들의 덥고 지루한 여름 온종일이
매미소리와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이다. 
 
  
아낙네들의 거친손은 일견 더디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입담좋은 아낙이 간간이 내던지는
우스갯소리뒤에 왁짜하니 터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성큼성큼 일감이 줄어간다.


굴비 엮이듯 새끼줄에 줄기줄기 매달린 담뱃잎들은
차례로 담배굴(담배 건조창)로 들어간다.
흙으로 높다랗게 지어진 담배굴 벽에 가지런하게
매달린 담뱃잎들은 흡사 도자기 가마에 들어간
안구워진 도자기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담배굴안에 담배 잎이 빼곡하니 들어차게 되면
젊은 축들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드는
담배굴 장작불때기가 기다린다.
(하긴 어느 시절부터인가 시골에는
아예 젊은이들 찾기가 어려워 졌기도 하지만...)

 
담배굴에 밤낮을 쉴새없이 불을 알맞게 잘 지펴야만
좋은 등급을 받아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탐스런
누런빛으로 변하게되는 장작 불때기...
담배농사를 짓는 집들마다에는 으레 거미같이
까맣고 등이 휘고 야윈 노파에게 그 일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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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굴 앞에서 밤새 불을 살피던 노파는
졸다가 깜짝 놀라기도 하고 다시 졸고 ... 
그러는 노파의 희고 거치른 머리카락 위
여름밤하늘에는 은하수 수없이 흐르고,
풀벌레 고운소리 또한 몇 수십번 되풀이되고...

 
희붐하게 먼동이 서서히 터오고 닭이 울고나면
제일 먼저 사랑방에서 자던 노파의 영감이 일어나고,
아들내외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선다.
그러면 노파도 그제서야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오금이 붙어 처음에는 잘 일어나 지질 않는다.


"아이고오..."
외마디 소리가 두어번 연이어지고도 부지깽이로
잿더미 깔린 아궁이 바닥을 짚고서야 겨우 일어난다.


담배굴과 마당 건너 외양간에서 밤새 방울을 쩔렁이던
누렁소와 장독간 장독들이 일순 빙글빙글 돌아간다. 
어금니를 물고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뜬 노파는
용케도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마루위에 앉아 몸을 기대어 본다.
아들 내외는 제쳐 놓고서라도 밤새 한번도 담배불 들이는 곳에
얼씬도 않은 영감이 은근히 미워 온다.

 
그러나 어찌하랴...
영감은 벌써 쇠꼴 한짐을 베어와서 쇠죽솥에
쇠죽을 끓이고 아들은  식전에 뒷밭을 한번 뒤집을
요량으로 쟁기를 지게에 얹고 있고,
며느리는 아침밥을 짓느라 부산한 걸... 
시골 부지깽이도 쉴틈이 없다는 농삿철....
너나 없이 다들 바쁘니 누굴 탓할 겨를이 없는 여름의 한가운데임을
깨달은 노파는 또한번 고달픈 한숨만 내쉴 수 밖에 없다.


또다시 어제의 매미는 이사를 갔는지 다른 곡조를
가진 매미가 감나무위에서 노래를 시작했고
담배엮는 아낙들의 손놀림은 쉬임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여름 몇날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후딱 지난후
담배굴속의 담배잎들은 철없던 푸른 빛깔을 벗고
왕족들과도 같이 기품있고 우아한 금색으로 탈바꿈한다.
예전 밭에서 거만하게 흐느적 거렸던  자존심도 다시 되살아나 있다.
그리고 그  자존심의 빛깔만큼 공판장에서 높은 감정가격으로 팔려 나갔다. 
  

그해 담뱃일을 해서 번돈은...

 
막내딸의 시집 보내는데와
맏손자 중학교 입학금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리고  쪼르르 담구멍 속으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새앙쥐 꼬리만큼도 안남은 돈은....

 
담배굴에 불때는 마누라의 밤샘고생도
아랑곳하지 않고 쿨쿨 코를 골며 잠 자던
무심한 영감의 아리랑담배 살돈으로도 조금 쓰였다.